[ 박영신의 와인사랑 6 ]특집4. 조지아 와인 여행기: 조지아 크베브리를 품은 코카서스 산맥의 신비로움속에서
[ 박영신의 와인사랑 6 ]특집4. 조지아 와인 여행기: 조지아 크베브리를 품은 코카서스 산맥의 신비로움속에서
  • 박영신 전문기자
  • 승인 2024.02.0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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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끝자락의 카헤티 날씨는 이상 기후로 인해 마치 여름날의 뜨거운 태양처럼 강렬했다. 11월의 추운 날씨를 예상하고 캐리어를 꾸렸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날씨에  놀라움과 함께, 얇은 옷을 챙기지 못해 걸칠 옷이 마땅치 않다는 어려운 현실들과 마주했다.

그렇게 투어 일정 내내 불편함은 이어졌지만, 그 또한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여져, 이런 날씨도 새로운 경험의 한 부분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행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도 예기치 못한 일들로 가득 차 있다. 그 속에서 긍정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고 더 큰 지혜와 깨달음을 찾게 되는 것 같다. 이번 여행도 그런 의미로 성장하고 새로운 경험을 얻게 된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  피르벨리 와이너리(Pirveli Winery)의 포도밭

Pirveli Winery의 포도밭은 카헤티(Kakheti) 지역에서 텔라비(Telavi) 지역 굴구아(Gulgula)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와이너리는 코카서스산맥 바로 눈 앞에 펼쳐진 카헤티의 멋진 풍경 속에서 현란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사로 잡았다. 다 지난 한여름 저녁의 낭만적인 포도 향기가 가득하였고, 이미 수확 철이 지난 사페라비 포도와 히흐비의 몇 남지 않은 포도송이가 홀로 매달려 있는 게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그 존재감과 아름다움을 매혹적으로 뽐내고 있는 모습에 그 순간, 마치 O.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담긴 이야기의 존재감이 떠오르곤 했다.

​❘피르벨리 와이너리(Pirveli Winery) 포도밭❘코카서스산맥 품에 안긴 듯 펼쳐진 포도밭 풍경이다.​
​❘ 피르벨리 와이너리(Pirveli Winery) 포도밭 ❘ 코카서스산맥 품에 안긴 듯 펼쳐진 포도밭 풍경이다.​

포도밭 사이를 채우고 있는 잡초들이 포도나무와 공생하며 버티고 살아온 모습이 눈에 띄었다. 선셋에 물들어 가는 코카서스산맥의 환상적인 배경 속에서, 젊은 와인 메이커의 열정도 뜨겁게 느껴졌다.

포도밭에 적용된 유기 농법과 그에 따른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코카서스 산맥을 포위하듯 펼쳐진 그 광대한 규모의 포도밭을 걸으며 지쳐가는 일행들은 마침내 "포도밭 산책은 이제 그만 하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코카서스에서 내리는 황홀한 선셋의 아름다움이 우리와 함께했기에, 아무도 그 아름다움 앞에서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 생각은 조용히 묻히고 말았다.

그곳에는 가는 길마다 우리를 따라다니며 연신 꼬리를 흔들어대는 달마티안이 있었다. 눈과 귀가 온통 까맣던 그 달마시안은 늦가을 땡볕에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그곳을 찾는 손님들을 그만의 방식으로 반겨주고 있었다. 조지아 어딜가나 볼 수 있었던 아무 의욕조차도 없어 보이던 길거리 축 늘어진 강아지들의 모습과는 반대로, 어쩐지 이 달마티안은 굉장히 역동적이고 활기찬 모습이 마치 열정이 넘치는 젊은 주인을 닮아있는 듯 어딘가 더 특별해 보였다.

피르벨리 와이너리(Pirveli Winery)는 전통적인 양조 기술과 현대적인 와인 제조 방법을 조화롭게 병행하고 있었다. 와인 숙성 과정은 정확한 온도는 19.2도와 습도 52%로 관리되며, 크베브리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도 쾌적하고 깨끗한 환경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와인을 마실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한 번씩 해본 경험이 있었던 나로서는 와인을 직접 재배하고 만드는 양조 과정에서의 환경과 위생을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철저한 관리와 좋은 환경에서 와인이 건강하게 잘 익어가고 있었다.

다음으로 시음을 위한 공간으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에서는 수십 종의 와인을 테이스팅 하면서 다양한 스타일의 와인들과 함께 조지아의 전통 간식, 다양한 치즈들을 함께 즐겼다. 시음한 와인 중에 사페라비 2022는 어린 빈티지임에도 부드러운 타닌과 긴 여운의 풀 바디감이 특징이었으며, 블랙 베리, 자두, 체리의 과실 풍미가 도드라지면서도, 옅은 가죽의 뉘앙스와 조지아 토양의 미네랄이 충분히 느껴졌다.

다소 아쉬운 것은, 몇 년 지난 빈티지 와인의 장기 숙성의 풍미를 함께 느껴보지 못한 점이다. 이 와이너리는 이제 열정을 품고 막 시작되는 곳이기에 그렇다. 어린 빈티지로 인해 레드 품종과 화이트 품종들의 아로마 특징은 잘 느껴졌지만, 장기 숙성이 가능한 품종들로는, 몇몇 와인들의 피니쉬도 궁금해졌다.

그래서 나는 몇 년 뒤 다시 한번 이곳에 꼭 와보고 싶어졌다. 그때쯤은 더 숙성되고 다양한 부케의 풍미를 지닌 와인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지금은 다소 어리고 영한 와인일지라도, 미래에는 이 와인들이 어떤 모습일지 그 기대감으로 다시 찾고 싶은 곳이 되었다.

와인 투어를 마친 일행은 Pirveli Winery의 소유주이자 젊은 와인 메이커의 저녁 초대로 텔라비(Telavi) 시내로 향했다. 비어가르텐의 문을 열자, 그곳은 현지인들만이 찾아간다는 특별한 공간으로 산속 별장 같은 분위기를 하고 있었다. 그곳은 텔라비 지역의 전통 음식과 함께 수제로 만들어진 맥주와 홈 메이드 쥬스가 일품이었다.

텔라비 시내는 마침 할로윈데이를 즐기는 젊은 조지아인들이 마치 공포영화나, 동화 속 주인공처럼 괴기스럽고도 재밌는 분장으로 오가고 있었다. 할로윈데이를 맞은 밤의 텔라비는 웃음소리로 가득하며, 그들이 걸어가는 발소리마저 그 이야기의 일부처럼 보이곤 했다. 숙소로 향하면서, 나는 텔라비의 눈이 내리는 겨울밤 풍경을 상상했다. 코카서스의 맑은 공기를 품은 눈꽃이 퍼져나가는 아름다운 풍경이 궁금해지는 이 특별한 공간에서 가을과 겨울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변화를 그려보며, 그런 텔라비 가을밤에 푹 빠져들었다.

Museum of Gremi

텔라비에서 수도원들은 가는 곳마다 풍경 속에 끼어 있을 만큼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이 깊었고 마음이 갔던 곳은, 그레미 성채와 대천사 성당이다. 그레미(Gremi) 마을은 고대 카헤티(Kakheti)의 수도이다. 그레미(Gremi)는 조지아주 카헤티에 있는 왕실 성채와 대천사 성당으로 이루어진 16세기 건축물이다. 현재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동쪽으로 약 175km 떨어진 크바렐리(Kvareli) 지역에 있는 같은 이름의 마을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계단이 이어지는 언덕 높은 곳에 있다.

❘그레미 성채와 대천사 성당❘언덕 높은 곳에 단단하고 오래된 돌벽으로 쌓여져 있다.
❘ 그레미 성채와 대천사 성당 ❘ 언덕 높은 곳에 단단하고 오래된 돌벽으로 쌓여 있다.

현재는, 지붕과 외부의 일부가 복원된 그레미 성채와 대천사 성당 방문은, 마치 오래된 고서의 책장을 넘기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시대의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함께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저항과 항쟁에 서린 역사적 체취가 느껴져서 그냥 예사롭게 지나칠 수가 없었다. 한때는 화려했을 역사 속에서 흐릿해 버린 이 성채는, 1565년에 카헤티 지역의 레반 왕이 그레미에 세운 궁전으로, 성채와 대성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왕국의 흔적이 남아있었는데, 성채 안에서 펼쳐진 역사적인 풍경은 마치 당대의 황금시대를 되돌아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당시의 번창한 도시인 그레미는 카헤티 왕국의 수도로써 역사의 중심이었지만, 1615년 페르시아 1세의 군대에 침공당해 번영하던 도시는 폐허로 남았고, 그 이후로는 17세기 중반에 수도가 텔라비로 옮겨지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레미의 폐허는 지금도 그 당시의 역사적인 흔적을 증언하듯 피부로 느껴졌다. 성채의 벽은 거대하고 튼튼한 오래된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텅 비어버린 창문 사이로 햇살이 들어와 건물 안은 산뜻한 공기와 함께 동시에 어둠에 가려진 비밀스러운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성당 내부로 발을 디디니, 눈에 띄는 것은 천장과 벽면에 그려진 화려한 벽화였다. 일부는 손상되었지만, 여전히 프레스코화로 채워진 벽면은 화려한 장면으로 가득하다. 숙련된 예술가의 손길로 그려진 이 벽화들은 신비로움을 잃지 않고 우리를 맞이한다.

❘대 성당 내부 프레스코화❘ 부분 훼손되었지만 일부 보존된 숙련되고 화려한 벽화다.
❘  대 성당 내부 프레스코화  ❘ 부분 훼손되었지만 일부 보존된 숙련되고 화려한 벽화다.

아는 만큼 느끼고 보인다고 하였던가, 대충 이 성당이 종교적인 의미로만 보았을 때는 흐릿한 벽화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고,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소련 시대를 포함해 수 세기 동안 살아남은 고대 프레스코화들 사이사이 19세기 조지아 합병 당시, 러시아 군인들이 쓴 곳곳의 낙서와 고대의 페르시아인들이 성인들의 얼굴에 던진 창의 흔적들을 보면서, 우리 민족이 겪었던 침탈과 약탈의 그 역사가 떠올라 어쩐지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대 성당 안에 그려진, 프레스코(Fresco)화는 젖은 석회 석고에 적용되는 벽화 기법이다. 프레스코 (이탈리아어 : affresco)라는 단어는 신선함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형용사의 프레스코에서 파생된 것으로, 덜 마른 석회 반죽 바탕에, 물에 갠 안료로 채색한 벽화를 말한다.

벽화에는 프레스코(Fresco)와 세코(Secco)가 있다. 프레스코는 석고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그림을 그려야 하는 어려움과 수정도 거의 불가능해 정확하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지만 보존 기간이 길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세코는 '건조하다'는 의미로 세코 벽화는 회벽이 마른 후에 안료에 접착용 매제를 섞어서 그리며, 프레스코보다는 특유의 광택을 느낄 수 있으며, 시간과 다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은 있지만, 보존 기간이 짧다고 할 수 있다. 재료에 따라서 회화작품의 보존기간이 달라지지만, 유화는 300년 정도, 한지 같은 중성지는 500, 그러나 프레스코 벽화의 보존기간은 1000년을 내다본다고 한다. 적어도 건축물이 살아있는 한 프레스코 벽화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유일하게 남은 대천사 성당은 이렇듯 아름다운 건축물로, 그 시절의 건축 기술과 예술적인 감각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성당의 화려한 장식과 기도의 흔적들이 그곳을 향한 조지아인의 신앙이 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성당을 나와 왕실 성채 문을 열고 들어서면, 역대 카헤티 왕들의 일련의 대형 초상화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이 그림들은 조지아 화가인 레반 초고스빌(Levan Chogoshvili; 1985)의 작품이다. 또 한쪽에는 오래된 문서 사본과 당시 사용된 의복과 사슬 갑옷들과 성안에 있던 고대 생활용품들이 보인다. 내부에서는 비디오 빔을 바닥에 비추어 이 지역이 어떻게 카헤티 중심에서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는지에 대한 그레미의 역사와 실크로드 시대의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준다. 분명 이곳은 실크로드 상인들의 경유지였으며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파괴되기 전 전성기 도시의 삶이 어땠는지에 대한 명확한 역사의 증거로 보인다.

궁전 안에서 종탑으로 이어지는 길은, 3층으로 이뤄져 있었고, 계단이 매우 가파르며 좁고 미끄러워 조심해야 했다. 계단이 가파른데 또 너무 좁아서 놀랐고, 중세 화장실은 왕과 왕비가 어떻게 사용했을지 의아할 정도로 너무도 작아 보인다. 또 이런저런 고대 생활용품들과 강으로 이어지는 비밀 지하 통로가 보존되어 있었는데 한 명 정도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다. 좁은 돌계단을 타고 탑에 오르면, 산과 알라자니(Alazani) 계곡의 멋진 전망이 매우 아름답고 흥미롭게 펼쳐졌다. 마침내 힘들게 위태로운 돌계단을 오른 보람을 찾았다.

그레미의 아름다운 종탑에서의 전망을 뒤로 또, 몇 군데 수도원을 더 방문했다. 카헤티 수도원은 거의 와인 마라니(Marani)가 있었다. 이번 조지아 투어를 하면서 그 시대의 조지아 와인은 수도원과 늘 함께였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만은 않았다. 이젠 내게 너무도 익숙하게 눈에 들어왔으니 말이다.

이날 피르벨리 와이너리의 젊은 와인 메이커는 우리에게 조지아 간식인 수제로 만든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마쪼니(조지아식 요거트; 견과류와 꿀을 넣은)도 경험시켜 주었다. 나는 기억하기도 참 쉬운 이름을 가진, 맛 좋은 마쪼니를 잊지 못할 조지아 음식 리스트에 또 하나 추가했고, 그 행복한 기억을 담고 다시 트빌리시 숙소로 향했다.

다음날에는 USAID의 차량 지원을 받아 Gia와 투어를 이어갔다. 이어 방문한 곳은 드디어 8,000년의 고대의 역사가 숨 쉬는 바로 그 현장이다.

❙  8,000년 고대의 역사가 숨 쉬는 현장

한때는 와인을 취미로 즐겨왔던 나에게 학문적인 와인 전공과 와인에 대한 깊은 고찰이 시작되면서, ‘왜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아닌 조지아가 와인의 최초 발원지일까?’라는 의문이 항상 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한 부분이다. 이번 조지아 와인 투어에서는 그 의문의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기대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8000년 전, 신석기시대. 그 시대의 삶은 너무나 먼 과거로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 직접 그 유적지를 찾아보게 되어 그 시대의 생생한 흔적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정말로 믿기 어려웠고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었다.

유물이 발견된 곳으로 향하는 길은 트빌리시를 벗어나 산과 마을 사이 평지를 따라간다. 가다칠리 고라(Gadachrili Gora), 슐라베리스 고라(Schulaveris Gora), 흐라미스 디디 고라(Khramis Didi Gora)와 같은 와인의 탄생지인 유적지를 찾아가는 길은, 트빌리시 시내에서 남쪽으로 거의 53km 정도 떨어져 있다. 조지아 도심 교통상황을 고려한다면 대략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된다. 프랑스 빈티지의 등급 와인과 같은 풍미 깊은 고급 와인을 취미로 즐겨왔던 나에게는 이곳이 나의 더 넓은 와인의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시작이기도 했고,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놀라운 힘의 원천으로도 보였다.

먼저, 찾은 곳은 가다칠리 고라(Gadachrili Gora) 유적지였다. 바로 옆에서는 현재 박물관 건축이 진행 중이었다. 건설 현장에는 거대한 건설 장비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안은 현장 사람들로 인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태양 빛이 강렬해서 가만히 서 있어도 금방 땀이 차오르고 눈이 부시기도 했지만, 그곳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나는 한 발 한 발을 서둘러 움직였다.

유적지는 곳곳에 파란색 천막으로 덮여 있었지만, 사이사이 걸을 수 있고,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틈새 길들이 나 있어서 이곳저곳을 둘러볼 수 있었다. 직접 손으로 만져보니, 찰진 흙과 돌, 자갈로 이루어진 토양이다. 이 느낌은 조지아 와인의 특유한 미네랄 맛을 떠올리게 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그 순간은 마치 시간의 틈새로 여행한 듯한 느낌을 주었고, 박물관 건설이 완공되는 그때 이곳은 어떤 변화를 맞을지 다시 한번 찾아보고 싶었다.

다음으로 슐라베리스 고라(Schulaveris Gora)의 마을을 지나 흐라미스 디디 고라(Khramis Didi Gora)를 찾아갔다. 이곳은 아직도 한참 유물 발굴 중이며, 고대 와인 항아리가 발견된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마침 현장을 지나가던 고고학자와 함께 유물을 발굴했다던 근처 마을에 거주하는 최초 발굴자와의 뜻밖의 인터뷰는 그날의 생생한 증언으로 더한 감동을 주었다.

❘ 8,000년 신석기 유물 포도 항아리  ❘  조지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포도 항아리이다.
❘ 8,000년 신석기 고대 유물 포도 항아리 ❘ 조지아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포도 항아리이다.

지금은 조지아 박물관에 고스란히 놓여 있을 신석기 고대 포도 항아리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여기저기 유적들이 발굴된 표식들이 눈에 띄었다. 고대 신석기 여인의 발자취를 따라 와인을 담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아직 발굴 작업 중인 이곳은 조지아 와인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 곳으로, 그 항아리의 남은 흔적은 와인의 오랜 역사와 함께한 증거였다. 포도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는 그 오목한 흔적 앞에서, 고대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와인의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신석기시대의 흔적들은 그들의 생활을 짧게 나마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들이 하루하루 살아내었던 치열한 현장이었고, 마치 그 생활들은 나의 상상력과 함께 시각적으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흙과 돌담들로 켜켜이 쌓여 있는 이 고대 유적지는 더욱 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항아리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소중한 단서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의 와인 역사의 시작에 대한 그 의문의 답을 찾았다기 보다는 너무도 묵직한 돌뭉치 같은 숙제 하나가 내 가슴 위에 얹어진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펼쳐졌던 인류의 와인 이야기는 단순한 수치로만 보여졌으며, 쉽게 와닿지 못했었다. 하지만, 현장에 와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 역사의 깊이와 무게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숙연해졌다. 하지만, 독자들이 현장을 직접 찾아보게 된다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고대의 숨결을 직접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유적지를 떠나 트빌리시에 위치한 조지자 국립 박물관을 찾았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다양한 유물 중에서도 특히 포도 항아리의 흔적을 직접 보고 싶었다. 그 항아리는 마치 고대의 비밀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항아리의 측면과 정면, 그리고 위쪽의 둥근 형태와 항아리 밑을 자세히 관찰했다.

조지아 토양인 진흙 점토로 곱게 빚어진 이 포도 항아리는 책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조금은 다르게, 그 크기는 내 팔을 둘러본다면 반만큼은 더 휘감겨 보일 정도로 폭이 꽤 컸으며, 내 머리에서 허리까지의 길이만큼의 크기를 자랑했다. 항아리 입구 쪽에는 마치 낙인처럼 찍혀있는 포도송이 문양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항아리가 포도를 운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면, 아마도 손잡이가 달려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항아리는 그렇지 않았다. 밑면이 좁은 모양이기 때문에 평지에 놓아둬도 쉽게 넘어질 것 같았다. 이를 살펴보면서 역시 조지아인들 또한 이런 전통적인 땅속에 묻는 방식으로 와인을 저장하고 즐겼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도 항아리 앞에서 고대 여인들이 와인을 담아내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이제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지만, 그 유물은 옛 시절과 현재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고리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포도 항아리는 조지아인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함께한 소중한 연결고리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  Kbilashvili Winery and Qvevri Workshop (크빌라시빌리 와인너리 및 크베브리 워크숍)

크베브리(Qvevri)는 조지아 와인을 발효, 저장 및 숙성하는 데 사용되는 대형 점토 용기로써 조지아에는 크베브리 제작을 위한 두 개의 주요 센터가 있는데, 카헤티(Kakheti)와 이메레티(Imereti) 지역이 있다. 그중에서 이날 방문한 곳이 바로 크빌라쉬빌리 와이너리(Kbilashvili Winery)었다. 이곳은 카헤티의 크베브리 장인으로 레미 크빌라쉬빌리(Remi Kbilashvili)와 그의 아들 자자 크빌라쉬빌리(Zaza Kbilashvili)의 작업장이다.

이 가족의 크베브리 작업장과 와이너리는 텔라비(Telavi)에서 약 3km 떨어진 작은 마을인 Vardisubani에 위치하고 있다. 그들의 워크샵은 크빌라쉬빌리 와이너리(Kbilashvili Winery) 및 크베브리 워크샵(Qvevri Workshop), 메크베브레 크빌리쉬 마라니(Meqvevre Kbilashvilis Marani)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Zaza Kbilashvili의 작업장을 찾아 크베브리의 전통적인 제작 과정을 직접 보기로 했다. 조지아 투어 마지막 일정으로 방문한 이곳은, 2013년에는 고대 조지아의 크베브리 제조 방법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 유산 대표 목록에 등재되었고, 유튜브에도 부자가 인터뷰와 작업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방영되기도 한 곳이기도 하다.

큐베브리 제작은 조지아에서 흔한 직업이 아니라,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되며, 그렇게 계승된 지식은 이미 큐베브리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는 Zaza의 아이들도 곧 5대째 장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보존된 가족 역사만을 고려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족이 아주 오래전부터 크베브리를 만들어 왔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Zaza의 집 앞에는 정원에 크베브리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Zaza는 자신들 가족의 전통과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며, 크베브리를 만드는 과정을 열정적으로 설명해 주었다. 작업실에서는 갓 빚어진 크베브리들이 무거운 무게임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크베브리 장인 자자 크빌라쉬빌리(Zaza Kbilashvili) ❘ 갓 빚어진 크베브리에서 설명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크베브리 장인 자자 크빌라쉬빌리(Zaza Kbilashvili) ❘ 갓 빚어진 크베브리에서 설명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Zaza의 열정 넘치는 설명 뒤에는 크베브리를 굽는 가마터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는 크베브리의 생산과정을 들으며, 장인의 흐트러짐 없는 정신을 엿볼 수 있었다. Zaza는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 크베브리 제작의 순간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정원에서는 다양한 꽃들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가운데, 발효와 숙성을 거친 크베브리 와인의 향과 맛이 깊이 있게 느껴졌다. 특히 르카치텔리 크베브리 와인 2022’는 장인의 정성이 담긴 묵직한 미디엄 바디감과 파인애플, 망고, 치자의 흰 치자꽃 향, 야생의 허니향과 미네랄리티한 맛이 어우러져 벨벳의 부드러운 목 넘김으로 긴 피니쉬와 함께, 타닌과 산미, 알콜은 완벽한 발란스를 이루었다.

마지막으로 Zaza의 건배와 함께 여행의 마지막을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 경험인지,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었다. 조지아의 풍요롭고 아름다운 자연과 또 인간의 열정이 공존하는 이곳에서 나는 와인의 맛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조지아의 와인 역사와 문화에 푹 빠져들었다.

조지아의 와인 투어는 확실히 잊지 못할 경험 중 하나였다. 코카서스 산맥이 보이는 그림 같은 포도밭, 오랜 역사 깊은 와이너리, 친절한 조지아인, 풍부한 음식과 크베브리 와인, 아름다운 풍경, 이 모든 것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조지아를 특별한 곳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8,000년 전의 와인의 흔적을 찾아간 조지아에서의 경험은 설레고 흥미로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예산지원은 물론, 시간까지 내어서 동행해주고, 또한 세계적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와 피아니스트의 멋진 공연에 초대해 준 USAID Gia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한다.

조지아에 가면 와인 여행을 떠나보라. 분명, 흥미로운 경험을 할 것이며, 조지아의 와인 문화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다음 편에는 조지아 와인 특집 마지막 편으로 에필로그를 담아낼 예정이다. 많은 기대 바라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그리고 묵묵히 달려왔을 여러분들을 위해 잘 숙성된 한잔의 크베브리 엠버와인과 가우마르조스를 함께 외쳐보고 싶어진다~^^

 

■박영신 소개

경희대학교 호텔관광대학의 와인 소믈리에 전공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조리 외식 경영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여러 와인 대회에서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수년 동안 와인 숍, 와인 전문바, 그리고 와인스쿨 운영 경험을 쌓았다. 더불어 식음료와 교육 분야의 다양한 자격증을 보유, 다양한 강의를 펼치고 있으며, 전문성을 갖추어 경험을 쌓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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