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영감독의 '고성방가'> 도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서민영감독의 '고성방가'> 도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오석주 기자
  • 승인 2009.09.12 13: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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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다는 것이 현실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초등학교 문턱에도 못 들어가고 책 한줄 안 읽은 사람들 중에서도 대성공을 이루어 낸 위인들이 많은 데 말이다. 물론 전혀 안 읽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밑바닥에서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주경야독 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학창 시절 공부를 못해서 좋은 대학 못간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시절 그 정서로 꼭 읽었어야 될 책을 못 읽었던 것은 몹시 후회가 된다. 예를 들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10대에 읽는 것과 30대에 읽는 것이 어찌 같을 수가 있겠는가...대기업 모회장님이 어린 시절 이 책을 읽고 소설 속 인물의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지었다는 얘기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10년 전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며 껄렁껄렁하게 다니던 고교 갓 졸업한 아이들과의 술자리가 있었다. 그때 아이들에게 내가 경험한바 노는 거야 누가 뭐라 한들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변하지 않기 때문에 딱히 할 말이 없지만 놀면서도 짬을 내서 책을 꼭 읽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왜냐하면 세월이 지나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리면서...

집안 얘기라 좀 껄끄럽지만 도움이 될까 해서 소개를 하자면~. 작은 누나는 직장 생활하며 남편과 함께 딸을 키우는 평범한 주부다. 개봉 영화는 거의 개봉 즉시 빠짐없이 보고 좋은 영화는 몇 번씩이나 본다. 거기다가 미개봉 영화나 지나간 명작들까지 나에 못지않게 엄청나게 영화를 보는 영화광이다. 책으로 이야기를 옮기면 ‘태백산맥’ 2번, ‘한강’, ‘아리랑’ 그리고 ‘토지’ 그 밖의 책까지 독서량도 엄청나다. 전업 주부도 아니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영화보고 책을 읽은 것이다. 같이 영화광인 큰 누나의 독서량은 내가 감히 쫓아갈 엄두를 못낼 정도이다. 그런 누나들의 집안 분위기 때문에 조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 같다. 조카 자랑을 늘어 놓을려는 의도는 없었는데...아무튼 책에서 떡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읽는 것일까?

몇 년 전 비교적 가장 잘 씌여졌다는 장 코르미에가 쓴 빨간색 표지의 ‘체 게바라 평전’을 읽었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라 많은 이들이 읽었을 것이다. 집집마다 책장에 붙박이처럼 꽂혀 있는 책이니까 말이다. 그 전까지는 그냥 티셔츠에 새겨진 체 게바라의 얼굴과 쿠바 독립을 위해 뭔가 큰일을 한 사람이구나 정도만 알았지 어떤 사람이었고 그가 가고자 하는 길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었다. 게릴라 전투 장면이 좀 지루하긴 했지만 아무튼 책을 다 읽고 나서 약간 멍한 상태에 빠졌었다. 그리고 곧 이어 의문이 일어났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비규환같은 전장에서 체 게바라는 짬이 나는 데로 책을 읽었다. 긴박한 전장을 옮길 때마다 책으로 가득찬 엄청난 무게의 탄약 박스를 옮겨가면서 그는 책을 소중히 다뤘다. 천식으로 몸도 성치 않은 체 게바라에게 그토록 책을 놓지 않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어떤 책을 읽던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데...전장에서 죽지 않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까? 투철한 신념이 죽음도 물리칠 수 있단 것인가? 체 게바라도 인간이라 미래를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체 게바라 평전’에서 제일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그의 독서였다.

옛 선비들이 놀고먹으면서 한가로이 정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지금 그랬다간 아마 남편은 아내에게 갖은 구박과 심지어 조금 과장하면 쫓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자신의 길을 가면서 경제 활동을 하고 부족한 시간을 잘 관리하여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읽은 자와 안읽은 자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술자리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자신있게 뭔가 아는 척을 하며 새로 알게 된 지식이나 정보를 미처 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구 늘어놓는다. 그런데 이 세계도 강호나 무림이라 반드시 자신보다 고수나 스승격인 인물들이 있다. 그들의 눈에는 사람들이 어설프게 막 지껄이는 내용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며 갈 곳을 잃고 표류하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인터넷이나 신문에서 방금 얻은 정보나 지식을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거기다가 마치 인생을 달관한 도인 뉘앙스까지 버무려 떠들어 댄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사람들의 눈빛은 안정되어 있지 않고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리고 남의 말허리를 잘라가며 급하게 내뱉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슈퍼 앞에 놓인 동그란 호빵통에서 따끈따끈하게 쪄진 호빵을 식기 전에 빨리 꺼내고 싶어서 인가 보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면서도 인정하는 사람은 많이 읽고 듣고 보고 느끼면서도 아는 척을 안하려고 하지만 본인도 모르게 땀구멍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사람들이다. 나도 아직 그 경지에 다다르려면 한참 멀었지만 그들이야 말로 진정한 고수가 아닌가 싶다. 평소에 말이 없다가 술자리에서 유독 술 취함에 업혀서 인생 운운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데 제발 인생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은 도인도 아니고 고수도 아닌 어쩌면 갓 입문한 하얀 띠의 최하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올바른 스승을 만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그런 자신의 레벨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하물며 도인 행세를 하다니...진짜 도인이 보면 얼마나 웃겠는가? 진정한 도인이 천기누설 하는 걸 본적이 있는가? 사람들 중에서 스승을 찾기 힘들다면 책이 대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고수가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나 보다. 어쩌면 끝내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을 수도 있는 일이고... [데일리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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