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前대통령 서거)'민주화·민족통일 향한 86년 외길'
(김 前대통령 서거)'민주화·민족통일 향한 86년 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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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9.08.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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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토마토 김종화기자] 우리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제15대 김대중(DJ) 전 대통령.
 
김 전 대통령은 1926년 1월6일 목포에서 34km 떨어진 외딴 작은섬 하의도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이 되기까지 파란만장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그는 군부독재에 맞서 싸운 민주화의 상징이자 인권신장의 기수였다. 납치와 테러, 사형선고와 6년간의 투옥 그리고 10년의 망명, 가택연금 등 온갖 고초 속에서도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섰다.
 
이때 얻은 별칭이 '인동초(忍冬草)', '한국의 넬슨 만델라' 등이다.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내에서는 대중적인 카리스마와 인기를 얻었고,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김대중'이란 이름을 각인 시켰다.
 
무려 4차례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으며 취임 이후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햇볕정책'이란 신조어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재임 중인 지난 200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 목포일보 주필..무소속 출마 4번 낙마
 
초등학교 시절 하이도에서 목포로 이주해 목포상고를 졸업했고, 그 후 사업으로 크게 성공했고, 23살 한창의 나이에 목포일보를 인수해 주필을 겸하기도 했다.
 
`45년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신민당에 참여했으나 8개월 만에 탈퇴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평생동안 '색깔론'에 휩싸이게 된다.
 
`54년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부터 정치인의 삶이 시작된다. 4번이나 낙마하는 등 천신만고를 겪었고 첫번째 부인 차용애씨와 사별하는 아픔도 겪었다. `61년 강원도 인제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당선된지 사흘만에 5.16 으로 국회에 들어서기도 전에 의원직을 잃었다.
 
`62년 두번째 반려자로 이희호씨를 부인으로 맞았고 `63년 6대 총선 때 목포에서 당선돼 본격 정치행보가 시작된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5시간19분 동안의 본회의 발언 기록을 세우는 등 리더 정치인으로 부각하기 시작했다.
 
`70년 김영삼씨와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신민당 대선후보로 나서 결선투표에서 김영삼 후보를 제치고 후보로 선출됐다. `71년 46살의 나이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부정, 관권선거의 분위기 속에서 94만표 차로 석패하고 만다.
 
◇ 대선 패배 후 사형선고 등 시련의 연속
 
대선에 패배하자 시련이 닥쳤다. 20여년 동안 무려 55차례의 연금생활과 5년반의 감옥생활, 일본 망명 등 2차례의 망명, `71년 테러로 추정되는 교통사고 등 차마 견딜 수 없는 혹독한 시련기를 보냈다.
 
`73년에는 괴한들에게 납치돼 바다에 수장될 뻔했고 오랜 가택연금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시기 다리를 다쳐 평생 다리를 절어야 했지만 내면은 더욱 강인해져 갔다.
 
`76년 '명동 3.1 구국선언'으로 투옥돼 2년9개월간 복역했고, `80년 '서울의 봄'으로 사면 복권됐으나 신군부 쿠데타로 다시 구속됐다. 급기야 `81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국제적 여론에 힘입어 목숨을 건졌으나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85년 귀국했으나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연행돼 가택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2.12 총선을 지원, 신민당 돌풍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후 후보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한 채 대선 출마를 강행, 민주주의 진영이 패배하자 비난을 받기도 했다.
 
`88년 총선 때 재기했고 `92년 다시 대선에 도전했으나 호남과 수도권의 압도적 지지에도 불구하고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93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94년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창립 이사장으로 활동하다 `95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그 해 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정계에 복귀했다.
 
`96년 4월11일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으로 자리를 잡았고, `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후보 단일화에 성공하면서 12월 네 번째 도전 끝에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 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
 
김 전 대통령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아야 하는 국가적 수치 속에서도 2년 만에 외환위기를 극복해냈다.
 
김 전 대통령은 야당과 일부 언론의 무조건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해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한 것이다.
 
대북정책에서 획기적인 진전과 업적을 일궈냈다. '햇볕정책'으로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햇볕정책'의 성과로 반세기 동안 닫혔던 북한이 문을 열었고, 2000년 6월13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6.15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긴장의 한반도에는 평화의 햇살이 비쳤다.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를 종식하는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 같은 공로로 김 전 대통령은 2000년 10월 21세기 첫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영광도 누렸다. 대한민국 역사상 첫 노벨상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물려주고 일선에서 퇴장했으나 먼저 간 후배 노 전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뉴스토마토 김종화 기자 just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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