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국제개발현장에서 만난 세대와세대 - 필리핀
[기고]국제개발현장에서 만난 세대와세대 - 필리핀
  • 김주헌 GGGI 필리핀 사무소장
  • 승인 2021.04.08 23: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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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헌 GGGI 필리핀 사무소장-

1959년 1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지역사회개발사업 - 比律賓 (필리핀의 한자병음표기)의 경우를 중심으로"라는 르포 형식의 기고문이 실렸다. 저자는 스페인 (1571~1898), 미국 (1898~1946)의 식민지, 그리고 일본의 점령기 (1942-1945)를 거치고도, 아시아의 신흥 부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필리핀의 농촌개발 사례를 전후 복구가 시급한 조국에 하나의 사례로 제공하려했던 듯 보인다. 전후 미국 장학생에 선발, 1956년부터 미국 남가주대학교에서 사회사업을 수학한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저자는, 유학 후 귀국길에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가장 잘 사나는 나라라고 알려진 필리핀에 들른 것이다. 필리핀은 한국전때 7,000여명이 넘는 파병군을 보낸 형제국이기도 했다. 

1959년 기준 필리핀의 1인당 GDP는 2,393달러였고, 당시 한국의 경우는 1,556달러였다. 일본 (5,665달러)을 제외하고는 말레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보다 경제규모가 앞섰다 (옥스포드 대학 Our World in Data 자료 참조). 1966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최초로 필리핀을 방문한 박정희 전대통령도 우리도 필리핀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점, 미국의 린든존슨 전대통령의 대아시아 구상 속에 1966년 10월 베트남 참전국 정상회담을 주최한 점, 1966년 12월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개발은행(ADB) 유치에 성공한 점만 봐도 당시 필리핀의 정치외교, 경제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 한국의 1인당 GDP가 필리핀을 앞서게 된 것은 1970년에 이르러서다. 

[1959년 조선일보에 실린 “지역사회개발사업 – 필리핀의 경우를 중심으로”라는 르포 기사]
[1959년 조선일보에 실린 “지역사회개발사업 – 필리핀의 경우를 중심으로”라는 르포 기사]

매년 아시아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막사이사이상”이란 것이 있다. 막사사이사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게릴라를 이끌고 일본군에 대항한 이력을 바탕으로, 국방장관을 거쳐 1953년 제7대 필리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인물이다. 재임 중에도 가족 및 측근들에게 혜택을 부여하지 않고, 스스로의 우상화를 경계하는 등 청렴한 면모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한창 때인 1957년 그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국하자, 전세계적 추모 물결에 더해 미국 록펠러재단이 1958년 50만달러를 들여 막사이사이 재단을 설립하고 막사이사이 상을 제정, 매년 아시아를 위해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을 수여 한다. 참고로 한국인 수상자로는 독립운동가 장준하 (1962), 이화여자대학교 초대총장 김활란 (1963), 법륜 스님 (2002) 등이 있다. 

당시 저자는 막사이사이 정부에서 수립한 농촌 지역개발사업의 사례를 조선일보에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저자가 필리핀에 방문한 시기는 막사이사이 전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직후의 필리핀이다. 자료를 살펴보니 농촌 지역사회개발을 위해 정부의 정책, 부락민들의 창의 존중, 전문 종사원의 양성이라는 세 가지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이 기사의 골자다. 2021년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정부 정책의 고도화, 농민들의 기업가정신 함양, 전문가 양성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는 것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막사이사이의 사망후 필리핀은 마르코스의 독재 정치시기를 거치며 암흑기에 빠져든다. 마르코스는 1965년 대통령 당선 후 21년간 장기집권했다. 막사이사이가 남긴 청렴의 가치는 가문위주의 정실정치로 무너졌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필리핀 경제는 재기를 시작했다. 젊은 인구, 도시화, 유연한 노동시장, 서비스업, 그리고 해외노동자의 송금력 (2020년 기준 GDP의 9.2%)이 경제성장의 근간이다. 2010년에서 2019년 동안 평균 6.4%, 2000년부터 2009년 동안 4.5% 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며 동남아시아의 신흥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다시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오랜 정실정치의 여파로 부익부빈익빈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농업 종사 인구가 빈곤층의 대부분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필리핀 농업섹터의 총부가가치(GVA)는 2019년 기준으로 약9%에 불과한 반면, 전체 노동시장 중 농업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23%다. 제한적인 기회를 놓고 경쟁이 치열하고, 섬나라의 특성상 유통과정 순탄치 않고, 비공식경제(informal economy) 거래가 많고, 잦은 기후관련 재해 때문에 가격 변동이 심한 점들이 주 이유다. 이제 미증유의 팬데믹까지 겹쳐, 필리핀 농업부문은 그 어느 때보다 소농들을 포함한 농업가치사슬 재정비, 농업 디지털화 등의 주제를 놓고 전환기로에 서있다. 정책 고도화, 기업가정신, 전문가 양성이라는 62년 전 르포기사에서 저자가 한국을 위해 필리핀 정책에서 배웠던 주제가 여전히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소개한 1959년도 르포 기사의 저자는 필자의 외조부다.

62년이 지난 후, 외손자가 국제기구에 근무하며 필리핀의 지속가능한 농업사업을 진행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셨을 것이다. 역사 앞에 겸허한 마음으로, 그 때 필리핀 정부에서 외조부께 너그럽게 지식을 공유해줬던 것처럼, 한국과 여러나라들의 선진지식들을 공유해 필리핀 농업경제 발전에 작은 기여라도 하길 소망한다. 그리고, 2021년 4월7일 (미국 버지니아) 향년 96세로 소천하신 외조부께서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한다.

[강만춘 박사가 이홍구 전주미한국대사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전해 받았다.]
[강만춘 박사가 이홍구 전주미한국대사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전해 받았다.]

*강만춘 박사: 한국 사회복지를 선도했던 강만춘 박사가 2021년 4월7일 수요일 저녁 9시36분 (미국 버지니아) 소천했다. 향년 96세. 중앙신학교 사회사업과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한국사회복지연구소장을 역임한 후, 한국사회복지학교 설립을 주도했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1976년 미국으로 이주한 뒤로, 1980년에 설립한 메릴랜드 상록회 회장 등을 역임, 워싱턴 기독교 사회봉사회 등을 중심으로 재미교포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했다.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 메릴랜드 주지사 표창, 강남사회복지인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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