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제국주의의 해체가 다문화사회에 주는 함의 - 최근 해외의 인종주의 문제 부상과 관련하여 -
문화제국주의의 해체가 다문화사회에 주는 함의 - 최근 해외의 인종주의 문제 부상과 관련하여 -
  • 조원호 前주가봉대사/ 정리=이지연 기자
  • 승인 2020.10.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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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말부터 본격화된 인종주의가 서구의 제국주의를 정당화시키는 식민담론이라면, 오늘날 제기되는 인종주의는 문화제국주의를 뒷받침하는 문화담론의 색채를 띠고 있다. 미국은 문화제국주의의 표상이다. 또한, 다민족 다문화 사회다. 지난 5월 미국의 흑인에 대한 과잉진압으로 촉발된 인종차별반대 시위가 유럽으로 확산되면서 인종주의에 대한 인식의 지도가 바뀌고 있다. 이는 문화제국주의의 해체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움직임은 최근 들어 다문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여기서는 미국의 인종주의를 중심으로 시사점을 살펴본다. 아울러, 문화제국주의를 사회통합 측면에서 접근해 본다.

인종주의는 생물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인종 간의 우열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현대 인종개념은 신체의 외형적 차이를 본질적 차이로 환원하고, 그것은 지적, 도덕적, 심미적, 예술적 차이에 연관시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인종주의에 대한 시각은 대체로 제도적, 문화적, 상징적 인종주의로 구분된다. 1876년 흑인에 대한 차별화를 합법화한 짐 크로 법이 제도적 인종주의의 대표적 예다. 문화적 인종주의는 문화적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인종적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관철하는 주의다. 1970년대 말 영국 토리당이 취한 조치가 문화적 인종주의의 좋은 예다. 토리당 은 타인종 문화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이민자를 사회의 동질성을 해치는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민자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취하도록 선동하였다. 상징적 인종주의는 특정 인종집단이 공동체의 이념이나 가치를 충분히 내면화하지 못한 근거에서 그 집단을 차별하는 것이다. 상당수 백인들은 흑인들이 미국사회의 핵심가치를 체화하지 못하기 때문에 흑인들의 경제사회적 지위가 낮은 것을 당연시한다. 미국은 1965년 민권법을 제정하여 인종차별을 철폐했지만, 현실적으로 사라지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상징적 인종주의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흑인집단은 차별화되고 타자화 되면서 정치적으로 종속되고, 경제적으로 배제되고, 사회문화적으로 제약이 강요되어 왔다.

사실, 문화는 단순히 대다수가 공유하는 생활양식이 아니라 사회집단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시민사회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권력이나 과시를 위해 피지배계급을 물리적 강압 대신 동의에 의해 지배하는 공간이고 헤게모니 투쟁과 갈등을 시도하는 장으로 문화를 활용해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고안한 ‘문화산업’이 이를 대변한다. 이 학파는 문화산업이 ‘대중을 기만하는 계몽’으로 간주하고, 이로 인하여 상상력이 제한되고 비판의식이 마비된다고 본다. 즉, 대중들이 집배계급의 상징, 가치관, 사고방식 등을 당연한 가치나 규범으로 받아들이도록 제약한다. 이런 구별짓기 문화가 금번 흑인 사망을 계기로 저항받고 있다. 즉, 문화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상징이나 가치를 둘러싼 ‘상징투쟁’이 표면화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국제적으로 외연을 넓히면 문화제국주의의 해체다.

미국은 1947년 마샬플랜을 통하여 제국주의의 종식을 천명했지만, 사실상 영국과 프랑스식 제국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원주민 학살과 흑인에 대한 억압이 미국이 천명해온 자유와 평등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역사적 사실을 은폐하고 사회적 모순을 봉합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논리를 폈다. 니얼 퍼거슨, 토머스 프리드먼 등 상당수 유력인사들이 21세기에도 미국의 존재이유를 제국주의에서 찾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미국은 문명과 야만의 2분법을 개발과 저개발로 바꾸고 저개발지역의 발전을 명목으로 개도국에 미국의 가치체계와 제도 그리고 문화를 이식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서구 식민담론의 본질은 피식민자를 열등한 유형의 사람들로 분류하고 이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지배체계를 확립하는 것이다. 반면, 미국 문화담론의 본질은 미국의 가치체계와 생활양식이 세계가 선망하는 대상이라고 자평하고 이의 전파를 통해 타자(otherness)를 미국식으 로 동질화시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의 묘사대로 세계를 ‘맥도날드화’하는 것이다.

미국은 미국의 문화적 제국주의는 ‘예외적’이라고 천명해 왔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의 내막이 밝혀지고 위선이 드러나면서 미국은 자신이 비판해온 제국주의와 다름이 아니라고 비판받고 있다. 특히, 최근 흑인에 대한 과잉 진압으로 시민사회의 동요가 일어나면서, 문화제국주의에 대한 상징투쟁이 나타나고 있다. 투쟁의 대상은 문명과 야만, 이성과 비이성, 합리성과 비합리성으로 특징지어진 형이상학적 이항대립이다. 무엇보다, 서구가 서구 용어로 쓰고 읽은 역사를 타자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다시 쓰자는 것이다. 이에 따라, 콜럼버스와 노예무역상 콜스톤의 동상이 철거되었고, 인종차별의 의미를 지닌 용어, 스포츠 구단의 이름, 학교이름이 바뀌고, 영화, 음악 등 예술작품이 거부당하고 있다. 세계적 기업들은 흑인 고용비율을 확대하는 등 기업문화를 바꾸고 있다. 일부 우리나라 기업들도 동참했다. 즉, 타자가 침묵에서 벗어나면서 문화의 지도와 인종에 대한 인식의 지도에 변화가 일고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과 최근 해리스 부통령 후보의 등장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문화제국주의의 해체는 고유문화를 되찾고 토착주의를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혼종된 문화 속에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미래 지향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흑인 민족주의자이면서 반제국주의자 제임스와 파농이 서구의 제국주의 문화유산을 지지하고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치, 경제제국주의와는 달리 문화제국주의에서는 공통의 영역에서 지배와 저항이 공존하면서 대립하고 식민자와 피식민자는 서로 영향을 미친다. 특히, 공통의 영역에서는 다양한 시각과 복잡한 인과상관성이 있기 때문에 단선적 흑백논리를 경계해야 한다. 흔히, 20세기 영국 소설 중 가장 뛰어난 작품 중 하나인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예로 든다. 콘래드는 이 소설을 통하여 야만적 제국주의를 고발한다. 그러나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가 타인종을 인간 이하로 비하한 소설이 우수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면서, 이 소설을 둘러싼 인종과 제국주의 간의 논쟁이 21세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식민종주국에 협조하고 부역했다는 사실 하나로 반역자로 낙인찍는 것은 타인을 광기로 몰고 침묵시키는 제국주의의 행태이다. 이런 부정적 행태를 극복하기 위해 프랑스, 벨기에, 캐나다의 퀘벡주는 상호문화주의(interculturalism)를 내세우고 있다. 상호문화주의는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동태적 인식이다. 즉, 영・미 에서 발달한 다문화주의가 종족마다 확연히 구분되는 변하지 않는 문화를 갖고 있어 차별과 갈등의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문화 간 상호 작용하면서 문화의 다양성 속에 공통의 문화를 중시하는 것을 핵심요소로 한다. 그러나 다문화사회 내에 불평등한 힘의 관계와 제국주의와 포스트 식민주의의 역사적 사실이 깊게 녹아있어 문화의 특수성 속에 문화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다. 프랑스는 ‘관용(tolerance)’을 통하여 이를 풀어가고 있다.

한국은 1980년대 중반까지 노동자를 유출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1990년대 초반이후 외국인 노동자를 받아들이는 국가로 변모했다. 한국에 체류 외국인 수가 2011년 140만 명에서 2018년 237만 명으로 급증했다. 2050년에는 총인구의 10%를 점유할 것으로 예측한다. 한국이 다문화 사회로 변모한 것이다. 이런 추세에 반해, 2000년을 전후하여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고 배제한 나라로 평가 받았다. 2007년 유엔인종차별위원회는 한국에 대해 ‘외국인과 혼혈을 차별하는 단일국가 이미지를 극복’하라고 권고 했다. 이를 계기로 시민단체가 외국인 노동자에 보다 깊은 관심을 보이고, 연구기관들이 관련 실태를 분석하고 대책을 내놓으면서 외국인에 대한 시각이 점차 개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외국인 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 대해 보편문화나 인권보다는 특수문화와 경제적 관점에서 보는 시각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문화적 인종주의와 상징적 인종주의가 한국사회에 내재화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해외 동포의 관점에서도 살펴볼 사안이다.

한국인의 사회의 질은 최근 OECD BLI(Better Life Index)지표에 따르면 33개국 중 32위를 기록하고, 특히 공동체 지표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사회적 관계단절과 신뢰부족 문제가 심각함을 의미한다. 또한, 외국인 체류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배타적임을 뜻한다. 사회의 질 개념의 시발점은 경제발전을 넘어서 사회전체의 발전 지향이다. 따라서 사회의 질 분석틀에서 사회 통합은 핵심적 가치이고, 사회통합의 핵심요소는 문화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문화 지향과 공동체 지향 사이에는 친화력보다는 긴장관계가 우세하다. 다문화가 차이와 해체를 지향한다면 공동체는 정체성과 응집력을 지향하기 때문에 서로 상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속에 사회통합을 성취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다. 두 개념을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한국사회의 과제이다.

최근 들어 한국은 식민지배가 현존하는 것처럼 상상의 사회를 조성하고, 저항 민족주의를 내세워 이분법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고, 포용과 관용보다는 ‘우리끼리’를 내세워 사회통합보다는 사회분열을 촉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는 서로 상대로부터 양분을 취해왔다. 20세기 중반 정치, 경제, 군사, 제국주의가 종식되었다. 문화가 제국주의의 보호막으로 작용해 왔음이 밝혀지면서 제국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문화제국주의도 해체되고 있다. 편협하고 원시지향적 민족주의도 해체되어야 한다.

*필자의 개인의견이며, 본 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조원호 대사(mahler.1860@yahoo.co.kr)는 OECD파견(무역위, 경쟁위), 주OECD대표부 참사관(개발원조위, 환경위), 주뉴욕총영사관 경제담당 영사, 주가봉 대사, KOICA 이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 대학원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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