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민족주의에 의한 글로벌 공급망 교란과 한국의 과제
경제적 민족주의에 의한 글로벌 공급망 교란과 한국의 과제
  • 조원호 전 OECD대표부 참사관
  • 승인 2020.05.22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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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호 전 대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2가지 측면에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에 의한 시장 자율화가 억제되고 정부 역할의 강화가 필요해졌다. 또 하나는 세계경제질서의 변화다. 냉전체제 해체이후 미국 중심의 일극체제가 다극 체제로 변모했다. 금융위기를 계기로 미국의 약점이 드러나면서 EU, 중국, 신흥공업국들도 세계경제질서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아울러, IMF를 중심으로한 브레튼우즈체제의 한계가 노정되었다. 또한, 세계경제체계가 개별국가 단위의 상호작용이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가치사슬로 서로 맞물린(interlocking) 구조로 인하여 국가단위의 거시경제운영에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다.

  이런 가운데 최근 주요 경제대국들은 신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우선주의’, 영국의 브렉시트,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애국주의’가 대표적 예다. 독일 메르켈 총리는 ‘유럽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중국 시진핑 주석은 글로벌 경제 거버넌스에서 중요 역할을 수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신민족주의는 시장 근본주의 내지 탈민족주의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특히,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WTO, EU같은 국제기구가 국가권한을 제약하고, 엘리트들이 자국민의 복지보다는 다른 나라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대한 반작용으로 부상했다. 이런 맥락에서, 신민족주의는 경제적 민족주의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경제적 민족주의의 고전적 의미는 자유시장 메커니즘에 의한 경제적 이득보다는 국가개입에 의한 국력배양에 중점을 둔다. 경제의 효율성이나 개인의 복지 향상보다는 국력강화가 우선한다. 포지티브섬 게임이 아니라 제로섬 게임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최근 신민족주의에 나타난 경제적 민족주의는 고전적 민족주의와는 달리 개인의 복지를 고려하고 국력과 국익을 함께 극대화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글로벌 경제가 서로 맞물린 구조임에 비추어, 경제적 민족주의는 다수의 국가를 연결시키는 가치사슬과 생산망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즉, 경제적 민족주의는 글로벌 공급망을 교란시킬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국제정치 외교적 갈등이나 무역분쟁에서 유발된 경제적 민족주의는 글로벌 공급망 무역에 위협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의미다. 작년 역사적 갈등에서 비롯된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조치로 인한 공급망 차질 우려가 좋은 예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 같은 재해뿐만 아니라 물류보안 미비, 지식재산권 침해, 문화차이 등도 위협요인으로 작용한다.

  최근 미국외교협회 하스 회장 등 국제정치경제 전문가들은 신민족주의나 코로나 팬데믹으로 글로벌 공급망 무역의 취약성이 드러나면서 보호무역주의 내지 자급자족경제의 움직임이 확산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 경우 우리나라는 가장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대외무역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112%까지 치솟았다. 미국, 중국, 일본처럼 지역가치사슬(regional value chain)을 주도할 위치에 있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경제는 제조업 중심의 수출구조를 특징으로 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 무역은 기업조직 활동이 대다수 국가와 지역에 분산 배치되어 있는 국제분업구조를 말한다. 즉, 제품의 설계, 원자재와 중간재부품 조달, 제조, 유통, 판매활동이 가치사슬로 전체가 연결되어 행해지는 교역구조다. 글로벌 공급망 무역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1960년대 활발해지기 시작한 서유럽국가 간 산업내 무역(intra industry trade)과 1965년 미국과 캐나다 간 자동차협정이 대표적 예다. 과거 공급망 무역의 주요 요인은 국가의 요소 부존도보다는 기업의 규모경제, 제품차별화이지만, 오늘날은 가치사슬이다. 과거 공급망은 주로 소득 수준이 비슷한 선진국 간 이루어졌으나 오늘날은 소득 수준과 경제여건이 다른 개도국들이 공급망에 연결되어 있다. 개도국들은 투자유치와 기술이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시장을 개방하고, 선진국은 저임의 노동력과 잠재 시장을 확보할 목적으로 개도국을 가치사슬에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와 달리 공급사슬의 60~70% 부가가치가 제조이외 사슬에서 발생함에 따라 공급망 전체사슬의 관리가 필요해졌다. 즉, 제품생산 중심에서 부품조달, 제품유통의 중요성으로 인식변화가 생기면서 과거에는 부분최적화를 중요시했지만 현재는 전체최적화를 목표로 한다. 이는 과거 개별기업이 중시되던 생태계에서 경쟁력 있는 외부기업(nods)과 긴밀히 협력하여 전체 생산망을 형성하는 기업환경으로 변한 것이다.

  이런 특색의 글로벌 공급망은 미국을 주축으로 멕시코와 캐나다, 독일과 프랑스를 축으로 폴란드, 체코, 터키가, 한국, 중국, 일본을 축으로 동남아시아 신흥공업국 간 형성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공급망이 북미공단, 유럽공단, 아시아 공단으로 지리적으로 군집하여 이루어지게 된 주요인은 공급망 무역이 거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산업부문에서 글로벌 공급망이 가장 발달된 부문은 우리나라가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는 전자와 자동차부문이다.

  미국 테네시주립대학 스리니바산 등 4명의 교수는 2010년부터 약 3년에 걸쳐 55개 국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 잠재력(readiness)을 경제, 정책, 인프라, 역량 4개 차원에서 현장 실태 조사했다. 그 결과 한・중・일 모두 양호한(B급) 평가를 받았다. 즉, 이들 3국이 공급망 무역을 강화하면 효과가 더욱 증가할 것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지리경제학자 로드릭교수가 10여 년 전에 이미 지적했듯이 한・중・일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구조적으로 상호 의존하고 있지만 상호 배타적 민족주의와 역사적 갈등 때문에 글로벌 공급망 심화를 통한 더 큰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게임이론에 비유하자면, 이들 3국은 ‘죄수의 딜레마’에 놓인 상태에서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다.

  공급망 사슬에서 볼 때, 소재, 부품, 장비(소부장)는 최종제품의 완성도와 부가가치 수준을 결정하는 제조업의 핵심이고 제조업 혁신의 출발점이다. 최종재 조립공정수준이 세계적으로 상향 평준화되면서 소부장은 산업경쟁력의 원천이 되었다. 일본은 가치사슬에서 가장 후방에 위치하고 첨단 소부장에서 독점적 위치에 있다. 최근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주요 첨단제품과 소재, 부품 1,200개 품목 중 894개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으며, 이 중 270개는 일본이 글로벌 독점력을 갖고 있다. 일본이 공급망을 교란시키면 우리나라 관련산업 전체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욱이 일본의 대외무역의존도는 30%에 불과하다. ‘극일’ 같은 구호나 ‘완승’ 같은 자위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다.

  중국은 자국 완결형 가치사슬인 홍색 공급망(red supply chain)을 구축하고 2025년까지 핵심 소부장을 70%까지 자체 공급을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미・중 무역전쟁의 핵심중 하나인 5G 네트워크를 생산하는 화웨이 공급망의 경우 30%만이 자체부품으로 이루어지고 나머지 70%는 미국(32%), 한국, 일본에 의존하고 있으나 홍색 공급망이 완성되면 국제분업구조가 전혀 달리 전개된다.   특히, ‘탈한국’이 일어나면서 우리나라의 전방 가치사슬의 상당부분이 끊기게 된다. 이를 대비하여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점차적으로 줄여 나가야 한다. 중국은 더 이상 우리나라의 생산기지 역할을 하는 생산공장이 아니다.

  한편, 미국은 최고 기술 수준과 소비시장을 보유하고 세계산업경제를 이끌어오고 있다. 서비스 부문에서는 독점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은 최근 인공지능(AI)의 발달에 힘입어 해외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특히, IT분야에서 값싼 노동력이나 원자재 확보보다는 기술력에 역점을 두고 생산 거점을 미국으로 복귀(리쇼어링)시키고 있다. 미국이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발전으로 생산비용에 맞춘 기존공급망 무역에서 벗어나면 통상무역의 지형도 변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은 미국, 일본, 독일 등 기술 선진국에서 핵심 소부장을 수입하고 이를 가공 수출하고 있다. 핵심 소부장의 의존도는 높은 반면 가공 부가가치율은 낮기 때문에 수출이 증가하면 수입도 증가하는 딜레마에 있다. 특히, 우리나라가 경쟁력 있는 범용 제품이나 소재, 부품 같은 중간재의 상당 부분을 중국이 자립화 내지 추격하고 있기 때문에 하방가치사슬을 고급화시키고 전방 소비시장을 확대시키는 포트폴리오 전략이 필요하다. 첨단 소부장은 부가가치와 파급효과가 매우 크지만 초기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성공 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이를 육성하기 위해서는 안으로는 시간의 축적과 70년대에 비견되는 전략적 산업정책이 필요하고,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과의 공급망을 더욱 확대하고 심화시켜야 한다. 즉, 내적으로 가치사슬의 하방단계에서 창의적 개념설계를 확충하고, 외적으로 하방 가치사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이들 두 나라와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근자의 정부정책이나 전반적 국민인식은 그 반대다. 일본을 배격하고 미국과 거리두고 있다. 반면, 한국의 가치사슬에서 탈피하려는 중국과 운명공동체를 내세우고 있다. 이는 1970년대 말 산업화에 대한 반발로 대두되기 시작한 민중(좌파)민족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민중민족주의는 ‘민족경제론’과 ‘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반을 둔다. 즉, 해방이후 한국 시장자본주의 경제를 일제 식민지 자본주의의 연장으로 간주하고 1970년대 이룩한 산업화 민족주의를 부정한다. 민중민족주의는 20세기 말 통치 담론이 되면서 민족의 부강보다는 자주를, 자유보다는 평등을 앞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분단 극복을 지향한다. 시장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는 희구할 대상이 아니라 넘어야할 장애물이다. 특히, 외자도입에 의한 수출주도형 경제성장은 경제의 대외종속을 유발한다는 이유에서 민족단위의 자립경제 체제를 주장한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민족지상주의를 선언한 배경이다. 산업화의 주역이면서 산물인 대기업이 ‘적폐’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근거다. 전 세계가 칭송하는 우리나라의 주체성을 우리나라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세계경제는 중소기업들이 아니라 소수의 초국적 거대 기업의 치열한 독점적 경쟁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체제에서 우리나라 대기업이 최선 경쟁하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불균형을 해소한다는 명목으로 국제 경쟁력을 갖춘 우리 대기업을 옥죄는 것은 빈대 잡기위해 초가산간 태우는 격이다. 대기업이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국제경쟁력을 더욱 높이고 중소기업이 혁신적으로 기술개발하고 생산성 향상하도록 즉, 대중소기업이 건전한 경쟁 속에 상생하도록 공정한 생태계를 만들어 주는 것이 정부역할이다. 선진국은 대체적으로 경제정책에 한하여 진보와 보수가 없고 좌우가 없이 자국 경제 발전과 기업을 위해 초당적이다. 선진국의 경제발전 역사에 단절이 없는 이유이다. 선진국은 돈 벌려고 애쓰는 기업이 돈 쓸려고 힘쓰는 정부보다 현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 기술국가들은 과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국력과 국익을 위해 신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세계를 재편성하고 있다. 세계경제를 이끌어 가는 거대 다국적 기업은 전 세계차원에서 공급망 계획과 실행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동북아 지역차원에서 일본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으로, 중국은 일대일로 정책으로 가치사슬의 외연을 넓히고 최종단계까지 선점하고 있다. 작년 미・중 무역전쟁에서 나타났듯이 글로벌 공급망은 생태계처럼 지속적이지 않다. 우리나라의 입지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민족끼리’라는 편협하고 편가르기식 민족주의와 ‘운명 공동체’ 같은 원시 부족적 닫힌 민족주의는 국익과 국력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조원호는?

조원호 대사는 OECD파견(무역위, 경쟁위), 주OECD대표부 참사관(개발원 조위, 환경위), 주뉴욕총영사관 경제담당 영사, 주가봉 대사, KOICA 이사, 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지역 대학원 석좌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해당 칼럼은 개인 의견이며 본 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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