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년 기획)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의 외교 막전막후]북핵 4자회담에서 빠진 '러시아' 공개적으로 불만 토로
(창간18주년 기획)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의 외교 막전막후]북핵 4자회담에서 빠진 '러시아' 공개적으로 불만 토로
  •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정리:이지연 기자
  • 승인 2019.10.2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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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김대중 평화재단 제공
자료사진=김대중 평화센터 제공

 

북핵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정무참사관으로 재직할때였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공중감시를 지속하고 있었으므로 영변 핵 활동에 대해서도 상세히 파악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1987년 공중감시 정보를 우리 정부에 알리면서 88 올림픽 전까지 북한이 핵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해 국제원자력 기구의 사찰을 받도록 대책을 강구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우리 정부는 서둘러 북한에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고 IAEA의 사찰을 받도록 제반 외교노력을 기울여 관철시켰다.

북한이 핵안정조치협정에 가입한 후 핵물질 신고 불일치와 일부 핵 관련 의심시설을 군사시설이라고 주장해 IAEA 사찰 대상에서 제외시킨 핵시설에서 핵활동을 했음이 밝혀지면서 IAEA에서 특별 사찰을 요구했다.

그러자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1993년 IAEA를 탈퇴하는 바람에 1차 핵위기가 발생했다.

정무차관보로 취임당시 가장 중요한 현안은 북한에 대한 평가와 정책을 공유하기 위해 한미일 정책 담당자간에 긴밀히 협의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6.25당시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한반도 위기를 조장했으나, 당시에는 힘이 약해질대로 약해져서 공세를 통해 도발하고 있는 시기였다.

곧, 북한이 NTP를 탈퇴하고 국제법을 준수하지 않으며, 비대칭 핵무기를 개발하거나, 한미일 관계를 이간하는 등 약해진 북한이 체제 유지를 위해서 하는 일탈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함께 협의했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 문제를 4자 회담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 문제는 남북 및 미국과 중국 4자가 모여 한반도 문제를 다루는데, 일본과 러시아가 빠져있어서 논란이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분단에서부터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문제에 깊숙하게 관여해 온 강대국이었다. 러시아는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러시아가 약체가 되었다고 4자회잠에서 배제된 것에 실망감을 표출했다.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 전문가로 알려진 게오르기 쿠나제 주한 러시아 대사는 직설적인 비판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외교부와 공식채널을 거치지않고 언론 인터뷰를 통해 러시아 배제의 부당성을 주장했다.

이에 공로명 장관이 그를 초치해 주의를 해달라고 지시해 그를 불러 자제를 해달라고 주의를 조치했으나, 그는 오히려 외국대사를 공식적으로 질책하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이에 "당신의 행동이 주재국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으로서 처신이 적절하지 않기때문에 이를 훈계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우리 외교는 4자회담을 통해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택을 했으나, 결과적으로 기대했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남북간에 기본적인 관계가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입증된 것으로 남북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않고 4자회담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에는 한반도에 이해를 가지고 있는 일본과 러시아가 배제된 때문으로 보인다.

한미 동맹관계는 우리나라의 생존과 번영의 핵심적 외교관계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바탕으로 국가의 생존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번영을 도모해 온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청와대에서 2년간 대통령 비서관으로 근무한 후 미주국장으로 임명되어 이상옥 외무장관, 유종하 외무차관과 일했다. 전임자인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은 주미공사로 임명돼 워싱턴으로 떠났다.

1992년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발효되어 비핵화를 위한 상호 사찰 규정을 마련하기 위해 북한과 협상하는 일이 미주국의 주 업무가 됐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따라 핵 사찰 문제를 다루는 업무는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92년 전 세계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시켰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미국 본토에서도 목표물을 파괴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을 뿐만 아니라, 전술 핵무기가 외국에 전진 배치됐을 때 테러리스트들이 탈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미·소 간 데탕트정책으로 미국이 소련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전술 핵무기를 철수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것인데, 우리 외교 당국이 이를 북한의 비핵화에 활용했다.

북한은 소련이 해체되고 동구권이 무너지는 위기 상황에서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고 비핵화를 선언하는 것이 위기 타개책이 되겠다는 전략적 판단 하에 남북기본합의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

남북기본합의서 협정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서 경제공동위원회, 군사위원회 등 각종 위원회가 구성됐다. 그중 하나가 핵통제공동위원회다. 핵통제공동위원회의 우리 측 초대 위원장은 공로명 당시 외교안보연구원장이고, 북한 측 위원장은 최우진 대사였다. 다른 공동위원회는 한두 번씩 열렸지만 핵통제공동위원회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이 채택되면서 비핵화를 위한 상호 사찰 규정을 만들기 위해서 판문점에서 협상이 개시됐다. 당시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고 핵안전조치협정에도 합의를 해서 IAEA의 사찰을 받고 있었다. IAEA의 사찰과 더불어 남북한 간에 별도로 상호 사찰을 받게 하는 이중 장치가 설치되면서 한반도 비핵화가 공고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북한이 한국군 군사기지는 물론 주한미군기지도 사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우리 측은 북한의 군사기지와 비공개 핵시설을 사찰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하지만 북한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이 밖에도 상호 사찰 횟수와 장소에 대한 협상 조건에서 북한 측은 상호주의 원칙을 거부했다. 북한 측은 정상적인 협상을 할 수 있는 대상자가 아니었다.

북한과 판문점에서 거의 1년 동안 실무협상을 계속했다. 우리 측 수석대표는 공로명 당시 외교안보 연구원장이었고 미주국장인 나는 부대표 격으로 협상에 참여했다. 실무적인 협상은 나와 북한 측 대표인 김광진 대좌 간에 이루어졌다.

우리 측은 초안을 만들어 먼저 제시함으로써 협상의 주도권을 잡는 전략으로 임했지만, 난관에 봉착했다. 어떠한 협상을 하든지 협상에 임할 때는 모든 나라가 준수해야 하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된 기본 원칙들이 있다.

북한은 UN에서 채택한 국제 문제를 협상할 때 지켜야 할 17개에 달하는 원칙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상호주의 원칙이 가장 중요한 원칙인데, 북한은 국제 기본 원칙을 미국 제국주의가 주도해 만든 편파적 원칙이라는 이유로 준용을 거부했다.

북한은 한국군기지는 물론 미군기지와 우리나라 원전시설까지 사찰하겠다고 요구했다. 반면 북한은 영변에 있는 핵시설만 사찰하도록 허용하고, 북한군기지는 사찰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 논거가 기장천외했다.

과거 한국 언론에 따르면 남한에서 전술핵이 미군기지 내에 배치되어 운영됐고, 북한은 핵을 군부대에 배치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애당초부터 사찰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찰 횟수도 우리가 1년에 12번씩 동수 사찰을 주장하면 북한 측에서는 6번만 받아야 되겠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은 처음부터 핵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설치한 적이 없으니 동수로 사찰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걸림돌은 팀 스피릿 문제였다. 군사훈련에 대해서 시비를 걸은 거다. 북한을 괴멸시키려고 하는 한·미 군사훈련 실시는 근본적으로 합의 정신을 깨는 것이므로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에는 팀 스피릿만 중단을 하면 북한 측이 대담한 양보 조치를 하겠다며 유인책을 썼다. 사정이 이러하니 판문점 회담은 실패했다.

미·소 간 SALT협상이 가능했던 것은 미·소가 상호 검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는 상호 사찰을 예비하기 위해서 예산을 확보해 사찰팀을 양성할 계획을 짰다. 미국이 사찰팀 훈련 계획에 전적으로 협력을 했다. 미국은 사찰 경험이 많으니까 우리에게 사찰 규정안도 주고, 지금은 기대할 수도 없는 미국의 핵시설을 시찰하도록 배려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문가와 장비도 대여해 준다고 약속하며 우리가 완벽하게 준비하도록 도와줬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협상이 타결됐을 때 즉시 사찰단을 파견할 수 있도록 미국이 대비한 거다. 우리나라 과학자들은 당시에 미국 핵시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을 거다. 미국이 우리 우방이지만, 핵 무장론이 대두된 이후부터 미국 핵시설 개방에 대해서는 비협조적이었으나, 북핵 시설 사찰 준비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고려를 했다.

김영상 대통령때의 경험이 있어서 2차 핵위기가 발생했을때는 러시아와 일본이 포함되는 6자 회담으로 열리게 되었다.
6자 회담도 9.19 공동성명 채택이라는 성과가 있었지만 북한의 반대로 재개되지 않고 있으며, 북한의 핵도발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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