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의 외교 막전막후]이집트와의 수교, 숨겨진 비화 ①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의 외교 막전막후]이집트와의 수교, 숨겨진 비화 ①
  •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 승인 2019.10.0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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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왼쪽/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오른쪽/남관표 주일대사

(2020창간 18주년 기획특집으로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의 외교관 시절 생생한 외교비사를 옮깁니다. 편집자 주)

아랍의 맹주 이집트와의 수교는 쉽지 않았다.

북한이 대사급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상황으로 우월적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언제나 기세가 등등했다.과거에는 북한 외교관이 외교단 행사에서 우리 공관장에게 “참석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트집을 잡으며 몸싸움을 걸어온 적도 있었다. 필자가 부임 할 당시 주이집트 북한대사는 60대의 김영섭이었다.

북한은 중동의 맹주(盟主)인 이집트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무엇보다 먼저 이집트가 1993년 이스라엘을 기습공격할 때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전쟁 후에도 이집트인이 가장 자랑하는 전쟁기념관을 지어주었다. 또한, 군사박물관에 걸려 있는 방대한 양에 이르는 이집트의 역사적 장면을 북한 화가들이 모두 그려주었고, 무바라크 대통령의 초대형 동상도 만들어주었다. 우상화에 익숙했던 터라 북한은 동상 제작에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

외교부 미주국장 임무를 마친 필자는 주카이로 총영사로 임명돼 현지에 1993년 부임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가 그런 이집트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1993년 필자가 주(駐)카이로 총영사로 부임할 때까지도 한국과 이집트는 영사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외교부 북미국장을 역임한 필자에게 조국이 부여한 임무는 재임 중 이집트와 정식으로 수교를 성사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 수교를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긴밀하게 접촉할 인물을 외무장관으로 생각하고 아므르 무사 외무장관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수교를 막고 있는 이집트와 북한의 특수한 관계가 무바라크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됐다.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무바라크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는 수교 활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카이로에서 북한의 외교적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킬레스건은 쇄락한 경제력이었다.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 드높았던 북한의 위상도 경제력이 쇠퇴함으로써 추락의 운명을 맞아야 했다. 실제로 현대의 포니를 비롯한 한국 자동차가 카이로 시내를 질주하고 있었고, TV와 세탁기 등 삼성과 LG의 가전제품이 중산층 가정을 점령하고 있었다.

남북한 역전은 걸프전쟁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전선국가 지원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정부가 지원한 한국산 군용차, 경찰차가 민간택시와 함께 카이로와 전국의 주요 도시를 누비고 다니자 북한은 더 이상 한국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집트 외무성도 대사급 관계와 영사급 관계를 전혀 구분하지 않았다. 외교단 행사에서 북한 외교관에게 말을 건네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북한의 존재는 미미해졌다.

필자는 오히려 풀이 죽어있는 김영섭 대사에게 다가가 대화를 주도하였다. “미주국장으로 재직할 때 판문점에서 한반도 비핵화 담보를 위한 상호사찰 규정을 마련하기 위해 1년 가까이 협상을 진행하였는데 최우진 대사의 고집불통 때문에 협상이 진척되지 못했다. 김영섭 대사가 대신 대표로 나왔더라면 협상이 잘 되었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농담도 건넸다. 김 대사는 65세 정년이 되어 1994년 5월에 귀국하였다.

1995년 이집트와 수교후 북한은 낙담했다.

북한 주재 이집트대사가 한국과 이집트의 수교를 북한 외무성에 통보한 데 대한 북한의 반응을 보고한 내용이 재미있다. 북한 정부가 이집트가 남한이 제공한 돈에 팔려 수교를 맺게 됐다고 비난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집트에는 두 번째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약 20억 달러 규모의 석유화학공장을 세울 계획을 발표했는데, 사업을 LG화학이 수주했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북한은 한국이 20억 달러짜리 화학공장을 지어주고 수교를 했다고 오인하고 억지 주장을 했다.

수교 당시에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 후 김영남 조선인민대위원회 상임위원장이 국가주석 대행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반응이 곧 북한의 공식적인 반응으로 평가된다. “한국과 이집트가 수교를 맺게 된 사실을 보고받고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너무 낙망하여 큰 피해를 낸 대홍수의 빗물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고 하면서 “우리와 이집트의 수교 사실에 북한 최고 당국자가 큰 실망을 표출했다”고 표현했다. 이집트 외무성 당국자가 북한 주재 이집트대사관이 보고한 내용을 내게 알려준 내용이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탈출한 사건 중에서 황장엽 망명 사건을 제외하고는 최고위 외교관인 장승길 대사의 망명 사건이 유명할 거다. 장승길 대사 망명이 실제로 발생한 것은 1996년 내가 귀국해서 차관보로 재직할 때 일이다.
 
재직 시 장승길 대사 망명의 전조가 되는 사건이 있었다. 장승길 대사의 둘째 아들 장철민이 망명한 사건이었다. 장승길 대사는 큰아들을 평양에 남겨두었고 작은 아들만 카이로에 데리고 있었다.

재정 형편상 미국 학교에 보낼 수가 없어서 장철민은 학비가 싼 브리티시 카운슬 스쿨에 다니고 있었다. 장철민은 학교에서 필리핀 여학생과 연애를 했다. 연애를 하느라고 매일 늦게 집에 들어오자 장승길 대사가 화가 나서 방에 가둔 모양이다. 18살 사춘기인 장철민이 반발해 우리 대사관 관저로 전화를 걸었고, 그 전화를 내가 받았다. 북한 억양의 젊은이 목소리를 듣자 곧바로 장승길의 아들이라는 걸 눈치 챘다. 그는 이집트에 머물고 있는 학생인데 한국에 유학을 하고 싶은데 갈 수 있는냐고 물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민감한 얘기를 전화로 하기는 어려우니, 이 번호로 전화하라”고 말하며 파견관 번호를 알려줬다.

북한 최고위층 자녀의 망명 기도에 직면한 필자는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그리고 관계관과도 충분히 상의한 끝에 장철민을 제3국으로 보내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해 본국에 그런 방향으로 유도하겠다고 건의하였다. 한국으로 망명하게 되면 북한은 필경 우리 정부가 미성년자를 납치하였다고 항의하며 외교적 쟁점으로 삼아 우리의 수교 노력을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이는 수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우리의 외교 노력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할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장철민은 우리의 도움으로 여자친구와 함께 이스라엘을 경유하여 캐나다로 망명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 사건에 대해 철저한 보안조치를 취하였다. 특히 언론에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이것이 훗날 장 대사 가족의 미국망명의 토대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장철민의 망명이 다음해 장승길 대사 망명의 원인이 됐다고 본다. 정철민 때문에 장승길 일가가 미국으로 망명을 한 거다.

장 대사의 부인은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만든 것으로 알려진 가극 ‘꽃 파는 처녀’의 주연배우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아마도 김 위원장이 중매도 하고 경력을 관리해 주었기 때문에 장 대사가 승승장구한 것으로 짐작되었다. 이것은 북한사회의 모든 인사가 최고 지도자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증거의 하나가 될 것이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 1995년 한·이집트 수교 그리고 1996년이 북한대사 망명이라는 초대형 북한 외교참사의 전조가 되었다.

당시 이집트 외무성의 아유브 한국담당 과장은 자택에서 파티를 여는 방식으로 필자가 장승길 대사와 접촉할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노력했다. 필자는 파티에 필요한 용품을 지원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장 대사는 비교적 자유롭게 행동을 하는 편이었지만 수행원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부인도 한복을 입고 리셉션장에 자주 나타났으나 항시 몇몇 실무 외교관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대화를 깊게 나눌 수 있는 기회는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다.

필자는 1995년 4월 수교에 성공하여 초대 주이집트 한국대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1년 후에는 정무차관보로 승진하여 금의환향을 하게 되었다.
한편 장승길 대사는 부인 덕분에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관리해주는 외교관으로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들의 캐나다 망명과 한·이집트 수교 성사에도 불구하고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고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필자가 본국의 외교부 차관보로 영전하게 되어 이임 리셉션이 열렸다. 필자가 마지막으로 장승길 대사를 만나게 되었다. 내가 장 대사에게 악수를 나누며 작별인사를 건넸더니 뜻밖에도 “축하한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나 때문에 막대한 업무상 피해를 입었을텐데 사태를 외면하기 보다는 직면하는 인간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귀국 후 정무차관보로 재직하고 있던 1996년 7월 장승길 주이집트 북한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는 기사가 도하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장 대사와 그의 가족과 접촉했던 당사자로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당시 조선일보 이상철 정치부장이 전화를 걸어와 장승길 대사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장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신신당부하던 광경이 문득 떠오른다.
 
카이로 주재 북한 대사 장승길부부에 앞서 잠적한 장대사의 형 장승호씨가 근무해 온 파리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가 들어서 있는 건물전경.

장승길 대사 부부는 먼저 서방으로 망명한 차남 장철민을 끝내 잊지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프랑스에서 외화벌이 요원으로 활약하던 동생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을 하기로 결심했다. 장 대사 부부는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는 날에 모든 절차를 밟은 다음 공항으로 가는 척하고 요원들을 따돌린 다음 카이로 소재 미국대사관으로 직행하였다. 이들은 이후에 미국에서 차남과 감격적 조우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양에 남아 있는 장남에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장승길 대사의 미국망명은 남북한 분단이후 북한의 최고위 외교관의 망명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북한에 수교와 망명이라는 이중 치명타를 가한 이 외교사건은 남북한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불행한 역사를 만들어냈다. 장승길 대사는 미국에게 북한이 중동에서의 미사일 판매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신변의 안전을 제공 받아 은둔의 생활을 지금도 하고 있을 것이다. 통일만이 참담한 인간 드라마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은?

정태익 한국외교협회 회장은 서울대 법대를 19회로 졸업하고, 네덜란드 Amsterdam University 에서 Diploma 및 서울대 대학원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제 2회 외무고시를 합격하였으며, 미주국장, 주이집트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외교안보연구원장,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주러시아 대사 등 외교관으로서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공직을 마친 후에는 동북아평화연대 공동대표, 석유공사 이사회 의장,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등으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 레프 톨스토이협회 명예회원이다.

학력

l 1970 : 서울대학원 졸업 법학석사

l 1965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졸업 법학사

주요경력

l 2017~현재 : 한국외교협회 명예회장

l 2014~2016 : 한국외교협회 회장,

l 2012~2013 : 단국대학교 석좌교수

l 2010~2011 : 한국석유공사 이사회 의장

l 2005~2012 :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 초빙교수

l 2007 :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기획조정분과 자문위원

l 2004~2005 : 외교부 본부 대사

l 2002~2004 : 주러시아 대사

l 2001~2002 :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l 2001 : 외교안보연구원장

l 1998~2001 : 주이탈리아 대사

l 1996~1998 : 제1 차관보, 기획관리실장

l 1993~1996 : 주이집트 대사

l 1992~1993 : 외교부 미주국장

l 1969 : 제 2회 외무고시합격

l 1966~1970 : 공군장교복무(공군사관학교법학교관)

논문 및 저서

l 러시아, 동북아시아 그리고 한국, 연경출판사 (2006)

l 한러관계의 새로운 발전 방향, 러시아외교아카데미 (2005) (논문)

l 새로운 동북아 질서와 한러관계, 외교협회 (2004)

수상

l 홍조근정훈장

l 대십자기사훈장 (이탈리아, 2000)

l 러시아 정부 훈장 (러시아, 2003)

l 황조근정 훈장 (2005)

언어

l 한국어; 영어; 일어; 독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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