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중앙화' 기치 내세우고 등장한 '암호화폐', 취지 무색..중앙은행 '느긋 '
'탈중앙화' 기치 내세우고 등장한 '암호화폐', 취지 무색..중앙은행 '느긋 '
  • 최은경 기자
  • 승인 2019.01.11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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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태동한 이래 세 가지 위대한 발명품이 있었다. 불, 바퀴 그리고 중앙은행이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새뮤얼슨이 인용하면서 유명해진 미국 배우이자 풍자가 윌 로저스의 말이다. 반은 농담으로 한 말이겠지만 그만큼 중앙은행은 어느 나라에서나 가히 독보적인 존재다.

중앙은행의 힘은 돈을 찍어낼 수 있는 권한에서 나온다. 경쟁자도 없다. 화폐발행권을 독점한다. 종이와 인쇄기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중앙은행은 그래서 '현대판 연금술사'로 불린다.

이렇게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중앙은행에 어느날 갑자기 암호화폐라는 이름의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거품이 한번 끼더니 전세계가 들썩였다. 거품은 가라앉았지만 암호화폐는 이미 중앙은행이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원래 중앙은행이라면 암호화폐가 달갑지 않아야 정상이다. 암호화폐의 핵심가치인 탈중앙화는 '중앙'은행과 대립한다. 암호화폐는 발행에 중앙은행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국경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 1만원은 미국에선 10달러로 바꾸지 않으면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그러나 1비트코인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1비트코인이다. 암호화폐가 게임의 법칙을 바꿔버린다면 통화량 조절에서 나오는 중앙은행의 권력은 무용지물이 된다. 실제로 암호화폐가 각광받기 시작할 무렵 중앙은행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지난 2017년 차현진 당시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이 국회에서 열린 공청회에서 "가상통화(암호화폐)는 지급수단도, 화폐도 아니고 상품에 가깝다"고 못 박았다.

문제는 더이상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마크 카니 영란은행(BOE) 총재는 9일(현지시간) 온라인에서 열린 좌담회에서 "지금으로선 비트코인과 같은 암호자산이 통화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면서도 "영란은행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에 열린 자세를 가지고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CBDC는 중앙은행이 직접 블록체인이나 분산원장기술(DLT)을 이용해 발행하는 전자화폐다. 

암호화폐 전문매체 비트코인닷컴에 따르면 같은 날 미하일 비드야킨 우크라이나 중앙은행 전략혁신국장은 "암호화폐 규제는 산업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하며, 담당기관의 수를 줄여 규제를 보다 분명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대 일변도였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다.


중앙은행의 태도가 달라진 이유는 탈중앙화라는 암호화폐의 취지가 사실상 무색해졌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운영 주체가 토큰을 발행하고 유통하는 '중앙화된 코인'인 리플(XRP)이 암호화폐 시장 시가총액 3위(코인마켓캡 기준)에 올라있다. 정부 대신 특정 암호화폐를 대량으로 보유한 '고래'들이 새로운 중앙으로서 시장을 통제한다는 불신도 생겨났다. 

9일 암호화폐 전문매체 크립토글로브는 중국 매일경제신문(NBD)을 인용해 전체 비트코인 물량의 약 87%가 전체 보유자의 1%도 안되는 소수의 고래에게 몰려있다고 보도했다. 1비트코인 미만을 보유한 개미들의 물량은 전체의 4.6%에 불과했다. 탈중앙화된 암호화폐가 기존 기축통화 체제를 대체하리라는 장밋빛 전망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암호화폐 위협이 사그라들자 중앙은행도 조심스럽게 암호화폐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중앙은행의 중앙은행'인 스위스 바젤 소재 국제결제은행(BIS)은 8일 '조심스러운 진행'이라는 보고서를 출간해 전세계 63개국 중앙은행의 70%가 CBDC를 연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3년 이내에 범용·도매용 CBDC를 발행할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그럴 것같다" "그럴 것같다" "가능하다"고 응답한 중앙은행은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6년 이내로 기간을 늘렸을 때 이 수치는 30% 후반대까지 뛰었다.

한은도 세계 중앙은행의 기조를 따라가는 모양새다. 한은은 지난해 1월 '가상통화 및 CBDC 공동연구 TF'를 발족했고, 7월 발간한 '암호자산과 중앙은행' 보고서에 "국제적으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CBDC와 관련된 연구도 지속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단기간에 한은이 CBDC를 발행하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하다. BIS는 보고서에 "대부분의 중앙은행이 CBDC를 도입해서 얻는 편익이 비용보다 클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고 밝혔다.

최근 금리인상 기조 때문에 한은이 CBDC를 발행할 동력이 사라졌다는 분석이 뒤따른다. 한은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 3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연구'라는 제목의 공동연구 결과보고서를 발행한 박선종 숭실대 법학과 교수에 따르면 애초 한은이 CBDC 발행을 검토한 이유는 마이너스 금리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11일 박선종 교수는 "일본은행이 소비 진작을 위해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하자 현금을 죄다 인출해 집에 보관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며 "디지털화폐를 도입하면 돈이 오히려 더 돌지 않는 '장롱예금' 현상을 방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저금리 시대가 저물면서 한은이 CBDC 도입을 검토할 이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명활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9월 발행한 '디지털화폐 도입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보고서에서 "향후 주요국에서 CBDC 발행 및 사용이 보편화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CBDC 도입은 통화정책뿐만 아니라 금융산업 및 금융안정 등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종합적 관점에서 CBDC 도입 방안을 검토하고 준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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