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시대별 이슈로 보는 한국경제 (3) 90년대, 금융실명제와 IMF..그리고 기업부도
[기획특집]시대별 이슈로 보는 한국경제 (3) 90년대, 금융실명제와 IMF..그리고 기업부도
  • 최욱태 기자
  • 승인 2017.11.06 22: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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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보그룹 부도를 보도하는 당시뉴스/출처:MBC뉴스화면 캡처
한보그룹 부도를 보도하는 당시뉴스/출처:MBC뉴스화면 캡처

 

재벌 독점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80년대 이후 90년대는 한국경제의 암울한 시기로 점철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두는 '금융실명제 실시'와,  한국의 금융위기에 이은 'IMF 구제금융 사태'를 꼽을 수 있겠다.

금융실명제의 명과 암

전두환 정권 시절 80년대 중반 3저 현상으로 단기 경기활황시기를 거친 한국은 93년 김영삼 대통령 당선과 함께 전격적으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게 된다.

김영삼 문민정부는 집권후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임시국회 소집과 동시에 93년 8월 12일자로 전격적인 금융거래 실명제를 실시했다.

실명제 이전에는 누구나 차명으로 은행거래가 가능했다. 이러다보니 금융현황을 파악하기 어렵고, 불법정치자금이나 불법 로비자금, 비자금등 다방면의 지하경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982년 불거진 장영자 어음사건을 들 수 있다.

1982년 5월초 사채시장의 큰 손이자. 정치권력을 등에 업고 최대 규모 금융 사기 사건을 일으킨 장영자 이철희 부부의 어음 사기사건은 7천억 이상의 어음을 유통시키고, 6천억 이상 어음 사기를 친 건국이래 금융관련 최대 사건이었다. 당시 공영토건과 일신제강등 유력 중견 기업이 피해를 입어 부도처리되는 극한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금융실명제 논의가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금융실명제는 일단, 투명한 자금흐름을 가능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한국사회가 그만큼 투명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지하경제의 온상이 된 차명거래등이 온전히 실명이 아니면 불법으로 규정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됐다.

가명이나 차명으로 여러 통장 개설이 가능하고, 각종 불법자금 용도로 사용되거나 , 뇌물, 부정축재 로비자금등 자유자재로 사용되던 차명거래가 일말의 여지없이 실명제로 전환되자, 재계나 정치권은 크게 반발했다.

이유는 가지각색으로 재벌등 재계에서는 기업의 거래 상황이 온전하게 드러나고, 기업들이 세금폭탄을 맞을 수 있다거나, 외환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 나라가 망한다는 망국론까지 내세우면서 강력하게 반발했고, 정치권도 정치자금 모금이 어렵게 되자 금융실명제 실시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의 금융실명제는 당시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격적으로 이루어져 한국의 금융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사회의 투명성을 확보하는데 일조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탈세를 막을 수 있는 장치와, 정경유착등 7~80년대 비리의 온상이 되었던 관행의 사슬을 일정부분 끊어내는데 성공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요인을 찾을 수 있다. 금융실명제 이후 부동산 실명제도 시행되어 실명제 정책은 더욱 촘촘히 이어졌다.


IMF, 한국경제 붕괴의 단초

90년대 들어 글로벌 시장은 물론, 한국경제도 불황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97년 IMF 사태가 터졌다.

금융실명제가 독이 됐다는 일부 주장도 있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한국내에서는 더이상 안전하게 숨길 곳이 없어져 해외로 자금이 이탈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가 일정 부분 영향은 주었을지는 몰라도 다른 여러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혀져서 일어난 것이 IMF구제금융 사태이므로 큰 설득력은 부족하다.

IMF 사태는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가 아시아 신흥시장을 돌면서 직격탄이 한국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국내적으로 볼때 한국의 재벌들은 80년대에 이루어진 정경유착과 문어발식 확장정책으로 그룹의 외형을 키우는데 주력해왔다. 외형확장에 있어서도 관치 금융에 의존, 과잉투자와 과도한 차입경영으로 부실화가 진행되면서 한계에 다다른 측면이 있었다.

또, 외환위기 당시 경상수지는 100억 이상 적자에 몰렸고, 외환보유액은 외자를 제외하면 50억달러 수준에 있어 외환이 취약했다.

1997년 11월 21일밤 10시. 당시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기업 연쇄부도로 인해 단기 자금 만기 연장등 외화차입이 어렵게 되고 대외신인도가 저하되어 IMF에 유동성 긴급 자금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청천벽력 소식을 전했다.

한국경제가 붕괴되고 성장일로에 있던 아시아의 용에서 부도국가로 전락한 것이다.

국제적으로도 외환투기자금의 습격이 아시아를 강타했다. 태국을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국제 외환 투기 자금은 인도네시아를 거쳐 홍콩에 타격을 입혔고, 홍콩을 강타한 여파가 한국을 부도국가로 내몰았다.

이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기업들은 연쇄부도로 이어졌다. IMF 사태 발생직전인 1997년 1월 재계 서열 14위 한보그룹이 권력형 금융부정과 특혜비리등으로 도산한후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등 대기업의 연쇄부도가 이어졌다.

IMF구제금융 직후인 1997년 10월 쌍방울, 태일정밀등이 부도가 났으며, 해태, 뉴코아등의 부도가 이어져 국가 부도사태가 현실화됐다.

따라서, 90년대 한국경제는 IMF와 기업연쇄부도로 이어지며 한국경제에 치욕을 던져주었으며, 이는 곧 80년대부터 계승된 정경유착과 투명하지 못한 지배구조 및 관치금융등이 어우러져 발생한 일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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