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시대별 이슈로 보는 한국경제 (1) 60~70년대, 간호사, 광부, 해외 파병으로 돌파구를 찾다
[기획특집]시대별 이슈로 보는 한국경제 (1) 60~70년대, 간호사, 광부, 해외 파병으로 돌파구를 찾다
  • 최욱태 기자
  • 승인 2017.10.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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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출처 박정희 대통령 전자 도서관
출처:박정희 대통령 전자 도서관

 

한일협정, 간호사, 광부 파독, 베트남 전쟁

1960년대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의 제1 과제는 경제개발이었다. 적법한 정권이양이 아닌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획득한 박정희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엇보다 경제살리기에 나서야 할 필요성을 느낀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은 '개발독재'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개발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경제를 일으켜야 한다는 논리였다. 경제성장 우선주의를 내 건 박정희 정권은 먼저 한일협정 조인에 나섰다.  외환보유고는 거의 바닥 수준에 처해 있었고, 당시의 경제상황에서 해외로부터의 차관도입도 쉽지 않은 최악의 상황에 처한 상태에서 박정희 정권은 '한일 국교 정상화'를 명목으로 삼았다.

집권 직후인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는 식민지배의 피해 배상 포기를 대가로 3억달러 무상원조와 3억달러 차관도입으로 자금 확보에 성공한다.

당시 굴욕적인 협상이라며 국내에서 극심한 반대에 처했으나, 박정권은 마침내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장면 내각 시절 수립되었던 제1차, 제2차 5개년 계획이 박정희 정부에서 새옷을 갈아입고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경공업 중심의 경제 발전을 꾀한 1차 계획에 이어 중공업 위주 및 수출에 비중을 높이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주춧돌이 되었다.

이 시기 한국정부는 인력수출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먼저, 간호사 및 광부의 독일 수출이 눈에 띈다.

'라인강의 기적'을 일군 독일은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이로인해 노동력 부족과 임금상승이 이어지면서 독일정부는 해외로부터 노동인력을 수급하기에 이른다. 한국은 이 시기 간호사와 광부를 파견하게 되고, 이들은 한국경제의 외화벌이를 위한 주요 역할을 하게 된다.

60년대초부터 70년대 후반까지 총 2만여명 가까이 광부와 간호사가 서독으로 파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독일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이 벌어들인 수입은 연간 3500만 달러에서 5000만 달러에 이른다. 여기에 더해 한국 정부는 독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들여오는데 성공한다.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해준 베트남 전쟁은 한국으로서는 또다른 변곡점이 되었다.

미국은 베트남과의 본격적인 전쟁에 임하면서 한국에 전투병 파병을 요청했고, 한국 정부는 1964년 비전투 요원 파병을 시작으로 1973완전철수할때까지 미국의 지지와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베트남 전장에 한국 젊은이들을 보냈다. 당시 파병된 병력은 5만명에 근접한 수준이었으며, 5천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베트남 파병'은 한국경제로서는 호재였다. 일본이 한국전쟁중 군수물자 생산기지 역할을 하면서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룬 바와 같이 한국도 파병 대가로 얻은 막대한 인센티브를 십분 활용, 향후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루는 단초가 될 절호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베트남 특수'는 박정희 정권의 안정적인 정치적 위상과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 베트남에서의 외화 벌이등 다방면의 효과를 얻는 주요 변곡점이 되는 사안이었다.

미국의 원조와 파병군인들의 외화송금등으로 외화보유고가 늘어났고, 군수물자 제조를 계기로 경공업 위주에서 중공업 위주로 전환하는데 연착륙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내수 산업과 수출이 호황을 이루면서 경제호황을 누리게 되는 데 일조해 70년대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재벌성장시대, 수출지향 정책 100만불 달성..그리고, 노동자 착취

1970년대 들어 한국경제는 수출 지상주의로 나아갔다. 베트남 전쟁을 기회로 중공업 정책이 성공을 거두면서 수출에 청신호가 켜지고 연평균 8% 성장이라는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반면, 분배보다는 성장제일주의에 빠진 한국경제는 재벌의 탄생과 함께 소수의 독점 자본가를 양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부와 기업의 유착, 그로인한 성장을 빌미로 양적 성장은 이루었으나 질적으로는 여러가지 문제점을 내포한채 불안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 당시 한국경제는 저임금과 노동력 착취를 대가로 성장을 추구하던 시기였다. 70년대 전태일 분신 사건, YH무역사건등에서 보여지듯, 노동자들의 삶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반면, 재벌들은 문어발 확장을 하며 독과점 카르텔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재벌의 성장가도가 본격화 된 이유는 박정권의 경제개발 우선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 소수의 기업이 정부의 비호아래 자본을 독식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 1966년 터진 사카린 밀수사건은 재벌의 암투를 드러내는 초유의 사태로 기억된다. 삼성그룹의 계열사 한국 비료공업이 당시 수천만원어치 사카린 원료를 밀수한 사건으로 이병철 회장이 물러나고 이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창희가 구속되는등 정경유착 음모설, 후계구도 암투등 수많은 루머를 남기며 종결된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재벌의 성장속도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서산 간척사업등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완수했다. 또, 1966년 국내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해외 건설시장에 진출하는 실적을 달성했다. 이어 70년대 중반 정부 주도의 중동진출이 본격화 될 무렵 중동에서 잇따른 공사 수주로 중동특수를 이루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삼성역시 반도체를 주 생산품으로 하는 삼성전자를 1969년 창립했으며, 금성(현재의 LG)은 국내 최초로 흑백TV를 생산해 상용화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현대자동차의 1호 국산 고유 모델 '포니' 생산등 6~70년대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재벌들의 사업구도가 형성되어가는 시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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