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한국 정당의 현주소를 묻는다.
[기고]한국 정당의 현주소를 묻는다.
  • 김대중 더불어민주당 인천시당 도시재생특별위원장
  • 승인 2017.09.2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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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더민주 도시재생특별위원장

우리나라의 정당 정치는 일제 강점기 이후 미군정이 실시한 제도에 따라(3인 이상이면 성립) 정치활동이 자유로워지자 좌익(?)이 중심인 건국준비위원회, 우익인 한국 민주당, 공산세력인 조선공산당을 비롯하여 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인민당 등이 결성된 것이 한국 정당사의 출발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정당 활동이 인정된 것은 1946년 11월 23일에 발포된 미군정 법령(美軍政法令) 제55호 ‘정당에 관한 규칙’에서 시작된다. 기준이 모호했다. 당원수가 3인 이상이면 정당이 성립되는데다가, 좌우익간의 대립이 심하여 주도적인 정치단체가 자생하지 못하고 혈연, 지연 중심의 소규모 사회적 연대관계의 증대로 수많은 군소정당만 난립했다.

 

우리나라 정당의 출발에서 주목해야할 하나의 사실은 이론이나 이념도 중요하지만 인물 본위의 집합체가 출발의 전조였다는 것이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으로부터 3김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당사는 한 인물과 그 인물을 둘러싼 파워 게임, 더 농축해서 말하자면 내가 받드는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그 아래에서 출세하겠다는 사람들의 정치적, 정략과 야욕의 현장이었다.

 

한국 정당의 역사는 출발부터 이념보다는 인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고, 특히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로 여당은 실세인 대통령 한 사람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였음은 잘 아는 사실이다. 야당도 뒤지지 않는다. 비록 민주 세력이라는 이름으로 그 정당성을 주장하였지만, 김대중 계열과 김영삼 계열로 나뉘어 서로 갈등 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해 김종필이라는 평생 여당의 거물이 새로운 또 하나의 야당 지도자로 부상한 이후, 한국 정치는 바로 3김의 절대적 영향을 받고 말았다. 결국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 이후 한국정치사는 3김 중 두 사람의 대통령과 만년 2인자이자 총리였던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된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정당들은 각기 다른 간판을 걸고는 있었지만 정책적 기조는 거의 유사하였고 그 실상은 바로 3김 대통령 만들기였다.

한국 정치를 잘 아는 현대 정치사가들의 입을 빌면, 광복 70년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정치인들은 한 지도자의 이상을 구심으로 하는 척 하면서도, 실상은 그 지도자에게 아첨하고 굴종하는 소위 출세전략을 통하여 자기의 정치적 출세를 도모하려는 사적 이해에만 골몰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의 정당 구조는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개의 부류로 나뉘기가 어려웠다.

한국의 정당이 의회주의 정당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제헌국회 성립 이후이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는 무려 48개 정당들이 참가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국 민주당 29명, 대동 청년단 12명, 조선민족청년단 6명, 기타 정당 13명, 무소속 85명이 선출되었다. 무소속이 85명이나 되었다는 사실은 독립 이후에는 아직까지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그런 다수정당의 난립 이유는 광복 이후의 혼란기라는 시기도 있었지만, 당시에 제정된 제1공화국 헌법에는 정당에 관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으며 별도의 정당 법규도 없었으므로 정당의 보호나 규제에 관한 법적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국회의원이 있는 정당은 원내교섭단체라는 국회법에 의한 대우를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정당의 성립도 용이하여 군소정당이 난립하고, 무력하게 해산당하기도 하였다.

여야의 성립은 1950년 총선거 후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절대 1인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자유당이 1952년에 창당되고, 1954년 11월 사사오입(四捨五入) 불법개헌 이후 위기를 느낀 당시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이 자유당 탈당의원 및 흥사단을 흡수하여 1956년 9월 민주당을 발족시킨 이후다.

 

그리하여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자유당 126명, 민주당 79명, 무소속 27명, 기타 1명이 당선되었는데, 이로써 군소정당들은 몰락하고 양당제도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양당체제는 제2공화국 내각제를 만드는 기폭이 되기도 하였다. 특기할 것은 조봉암이 1956년에 만든 진보당으로 이때의 진보당의 강령은 지금으로 보아도 혁신의 패러다임이었다.

제2공화국 때는 민주당 신구파의 대립이 심했지만 거의 민주 1당 체제였고, 제3공화국 시절에도 공화당과 김영삼 김대중의 야당 세력이 통합과 반목을 반복하며 이합집산 하였으나, 결국 유신 이후 유정회라는 기형의 선물을 낳으며 정당정치는 실종됐다. 1978년 신한민주당이 의석에서는 민주공화당과 유정회에 뒤졌으나, 득표율에서 총 32.8%를 얻으며 민주공화당을 앞섰고, 이는 곧 장기집권의 피로가 가중된 국민들의 민심 이반이 드러나는 촉매제 구실을 한 것이다.

 

1981년 2월 25일 제5공화국이 시작되고 이후 6공화국까지의 한국의 정당사는 변화 그 자체였다.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고 치른 3월 25일 제1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정의당 151석, 민주한국당 81석, 국민의당이 25석을 획득하였다. 이것은 1985년 2월 12일 제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대도시를 석권하며 50석을 차지하면서, 1986년 2월 대통령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하여 1987년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둔 신호탄이었다.

6·29선언에 따른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결국 양당정치제도가 아니라 다수당의 전략적 선택과 국민들의 지지가 이끌어낸 쾌거로 기록될 수 있다. 6공화국의 제한적인 민주화의 추진과 5공과의 단절 등은, 그해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1석, 무소속 9석을 획득이라는 다당제 실험의 모태를 생산해 낸 것이다. 집권당인 민정당의 33.9% 득표는 여소야대 국회를 이끌며 5공 비리 청산과 광주민주화혁명의 진상규명을 끌어내는 원동력으로, 의회민주주의의 표본이 되었으나 대통령을 향한 지도자들의 욕망과 무리들의 야합은 결국 3당 합당이라는 기형의 선물을 만들어 이 나라의 정치지도를 퇴보시켰다.

1993년 2월 25일 14대 문민정부가 출범 이후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선거의 결과는 민주자유당 116석(38.5%), 민주당 75석(29.2%), 통일국민당 24석(17.3%)로 나타났다. 이는 3당 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비판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결국 정국판도를 3당 통합 이전인 13대 초기의 여소야대 상황으로 되돌려 놓았다. 정권의 시녀로부터 벗어나고자 정주영이 선택한 정당인 국민당이 캐스팅보트를 쥔 정당으로 거듭난 순간이었고, 한국의 정당이 비교적 활발하게 움직이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후 민주당은 새정치국민회의가 되어 김대중을 호남 최초의 대통령으로 탄생시킨다.

 

2000년 권영길을 당수로 민주노총의 지원 아래 탄생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이 통합진보당과 진보정당, 정의당으로 분열되더니, 결국 주장하던 노동자 농민, 비정규직의 절대 지지도 받지 못한 체 보수에 의해 분열되었다. 그러나 한 때 국회 내 원내교섭단체를 형성하며 민주와 정의를 외치던 그들의 활동은 한국의 정당사에 남을 것이다. 지금도 정의당은 심상정 전 대표가 조기대선에서 선전하였듯이, 국회의원 6인으로도 활발한 의정활동과 대외활약을 통해 그 존재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말을 빌려오면 ‘한국 정당의 이념적 취약성은 현대 민주주의에 있어서 정당의 역할 감소와 함께 더 가중되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는 국민의 이해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당도 국민의 양분된 이해관계에 따라 이념적으로 크게 양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쇄신, 복지 정책의 활성화, 경제적 발전 그리고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등은 다원화 사회(pluralsociety)를 형성에 이르렀고, 보수나 진보의 가치 어느 하나에 얽매인 것이 아니라 사안별로 보다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쪽으로 국민들은 시각을 조정하여 갔다.’

정치학자 두베르제(ManriceDuverger)는 저서 <정치의 기술>에서 ‘소련이나 미국의 20년 후 국가 발전 청사진은 거의 비슷하다’고 말함으로써 정치에 있어서 이념의 무의미성을 지적했다. 즉 현대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정당 간의 이념적 구별은 어렵게 되고 정책적 차별성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의 정치는 감성의 정치다. 현대 선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정책이 아니라 후보들의 이미지를 대중이 선호하는 방향으로 만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미국의 정치심리학자 드루 웨스턴(DrewWestern)은 <감성의 정치학(ThePoliticalBrain)>을 통해, 선거에 이기려면 ‘이성적인 정책 제시보다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함’을 강조하며 비이성과 감성을 촉구하고 있다.

 

그 후 전 대통령 박근혜에 의해 새누리당이 되었던 현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한때 국회의원이 160명이나 되었었다가 지금은 107명이다. 그리고 새롭게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은 120석이다. 진보정당인 통합진보당의 퇴출 이후 진보정당은 정의당의 세만 유지하고 몰락했으며, 다당제가 되며 40석의 국회의석을 보유한 안철수 전 대선후보가 만든 국민의 당이 원내 제3당이 되었고, 신보수정당인 바른정당이 20석이다. 특기할 것은 여러 이유로 무소속이 5명이나 되고 없어진 새누리당이 다시 태동하면서 1석의 의원을 보유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은 다수당의 시대인 것이다. 노태우 정부 이후 다시 생성된 다수당 시대는 어쩌면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정치인들의 고질병인 지역관념과 기득권 유지에 다른 이해득실만 버려도 다수당의 존립이유는 한국의 정당사에서 명약관화하다. 그리고 이제는 지도자의 의중이나 엿보던 시대도 아니다. 권력은 총구나 힘에서 나오는 곳이 아니라 작은 권력이라도 쥐려는 자들의 아첨과 비굴에서 나오지만, 이제는 3김 시대의 절대적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도 없고, 또 생겨서도 안 된다. 다수당이 원내를 호령하여 기득권을 행사하는 행태가 한국 정당사의 표준 모델이라면, 이제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지금은 다양성이 공존하고 다양한 생각이 창조와 혁신을 낳는 시대다. 이런 시대에 양당제로 숨통을 조이는 행위는 다양성의 부재와 창조적 정신의 퇴로를 막는 셈이다. 민주적 자본주의의 계속적인 쇄신, 복지 정책의 활성화, 경제적 발전 그리고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 등 소위 생산적 창조사회를 지향하기 위해서도 우리에게는 이제 다원화 사회(pluralsociety)와 다원화된 정치제도의 발달은 요원한 과제다. 정당 정치의 근간이 권력의 쟁취에만 있었던 지난 정치의 본질 아닌 본질은 이제 버려야 한다. 대신 정당정치가 국민과 호흡하고 국민을 통해 환생하는 상생호흡의 미덕을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 정권의 쟁취에 따라 이분화 되는 여와 야의 상황 역전과, 그에 다른 극한대립의 전철을 지속가능한 상생공존과 견제와 균형의 절제된 미덕으로 치환해야 한다.

 

정당은 정치를 통한 대립으로 분열된 사회를 만들지만 국민은 그 분열된 아노미를 균형이 맞는 의식으로 승화시키려 노력해 온 존재다. 이제 우리 정당 정치는 본연의 임무인 ‘국민에 대한 예의’를 최대한 받드는 자세로 환골탈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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