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에 푼돈 22조원 어디로?
시장에 푼돈 22조원 어디로?
  • 이윤영 기자
  • 승인 2009.02.02 1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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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대출은 원활히 하지 않고 단기상품 '이자놀이'에만 관심
은행권 '몸사리기' 돈이 안돈다...中企·서민엔 '돈 가뭄' 심각

[이브닝경제]최근 4개월간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정부와 한국은행이 집중적으로 시중에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하고 있다.

하지만 중앙은행의 기준금리가 사상 최저(2.5%) 수준으로 금융권에 돈이 넘쳐나고 있지만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여전히 '돈 가뭄'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9월 리먼 브라더스 사태 이후 시중에 22조 원에 이르는 돈을 공급했다. 지금까지 공급한 금액은 당초 공급하기로 계획했던 22조7천억 원 가운데 97%가 해당된다.

이는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 및 매입 15조9천억 원, 통안증권 중도 환매 7천억 원, 국고채 단순 매입 1조 원, 채권안정펀드 지원 2조1천억 원, 예금지급준비금 이자 지급 5천억 원 등이다.

이른바 유동성은 넘쳐나는데 돈이 시중에서 제대로 돌고 있지 않아 문제다.

현재 은행들은 한은에서 싸게 빌린 돈을 대출로 운용하지 않고 초단기 금융상품인 MMF, 즉 머니마켓펀드에 예치해두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기준금리인 2.5%에 한은에서 돈을 빌려와 3%대 이자를 주고 있다.

즉, 한은이 2.5% 금리로 환매조건부채권(RP)를 사주면 이 돈을 받아 3%대 이자를 주는 MMF에 예치하는 것이다. 저리로 공급받은 돈을 대출 확대보다는 정례 환매조건부채권(RP) 매각 입찰에 참여하는 등 한은에서 풀린 돈이 다시 한은 금고로 되돌아오는 형국이다.

이 펀드에 지난달 20조 원 이상이 유입됐다. 총 설정액은 100조 원을 훌쩍 뛰어 넘어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사실 지난달 9일 시행된 한은의 정례 RP 매각 입찰에는 사상 최대인 80조 원이 몰렸다. 은행 입장에서는 기준금리 수준인 2.50% 이자를 받더라도 한은에 돈을 넣어두는 게 났다는 것.

더구나 증시 불안, 부동산 및 경기 침체와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기업 부실 악화를 우려한 은행들이 신용등급이 높은 대기업에만 대출을 늘리고 조금이라도 높은 이자를 주는 단기금융 상품 쪽으로 몰렸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대출 대상, '대기업과 우량 중소기업에 집중돼' 

지난달 국민은행, 우리은행 등 시중 6개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은 지난달 29일 현재 308조2039억원으로 전달보다 0.7%(2조214억원) 증가하는데 그쳤다. 이 규모는 월별로 보더라도 작년 12월의 5조2천611억 원보다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며 우량 중소기업에만 몰리고 있다.

자영업자들에게는 더 인색했다. 국민·신한·하나은행의 개입사업자(소호) 대출은 지난달 29일 현재 55조4161억 원으로 작년 말보다 0.1%(430억 원) 줄었다.

반면 기업은행을 제외한 5개 시중은행의 대기업 대출은 지난달 29일 현재 60조4천407억 원으로 5.1%(2조9천94억 원) 급증했다.

한은 관계자는 "12월을 지나 1월 들어 은행권의 기업대출이 늘어나고 있지만 중기 대출보다 대기업 대출이 더 많다"면서 "중기 연체율이 급격히 올라가는 등 신용 위험이 함께 커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의 말을 빌리더라도 은행권의 중기 대출 연체율은 작년 말 기준 1.70%로 전년 말보다 0.70%포인트 급등하고 있다. 반면 대기업 대출 연체율은 작년 말 0.34%로 0.03%포인트 하락했다.

채권시장도 대기업으로 투자자금 쏠림 현상 가속

시중자금이 신용도가 높은 곳과 대기업 쏠림 현상은 채권시장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같은 날 증권업협회에 따르면 우량등급인 더블에이 마이너스급(AA-)급 회사채(3년 만기) 금리는 지난달 30일 현재 7.29%로 0.43%포인트 하락했다.(지난해 12월은 7.72%였다)

반면 비우량 등급인 트리블 비 마이너스(BBB-)급 회사채 금리는 같은 기간 12.02%에서 12.16%로 오히려 0.14%포인트 상승했다.

‘채권시장 안정용’이라는 본래 기능에 걸맛지 않게 ‘채권시장안정펀드’도 신용등급이 우량한 은행채, 회사채 등에만 투자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펀드는 지난달 29일 회사채 A등급과 BBB+등급, 여전채 A등급을 중심으로 신용보증기금의 신용보강(지급보증)을 거친 채권 1조 원 어치를 사들였다.

91일짜리 기업어음(CP) 금리도 신용도가 높은 A1 등급의 경우 작년 말 6.39%에서 지난달 29일 3.98%로 2.41%포인트 급락했지만, 비우량 등급인 A3+ 등급은 7.41%에서 6.53%로 0.88%포인트 떨어지는데 그쳤다.

반면, 전문가들은 실물경제 구석구석까지 돈이 돌게 하려면 결국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대출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은행이 이 BIS 비율을 12% 이상으로 유지할 것을 권고해왔다. 이 때문에 은행은 공격적인 대출을 하지 못했고, 결국 금융당국은 조만간 BIS 비율을 탄력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은행권의 입장에서는 경기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기업과 가계에 대출을 많이 해줄 경우 부실화돼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하락하고 연체율은 상승할 수 있다는 우려감이 높은 것도 사실이다. 금융권은 곧 출범할 은행 자본확충펀드에 어느 정도 기대를 걸고 있다.

이에 따라 금융위원회는 2월 초 펀드 세부운영 방안을 발표한 뒤 같은 달 중순부터 은행들로부터 작년 말 BIS 비율을 감안해 자본 수혈 신청을 받는다. 금융위는 신청 은행들이 발행한 신종자본증권과 후순위채를 사들여 자본을 늘려줄 예정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자본을 늘릴 경우 기업 대출이 부실해지더라도 BIS 비율을 일정 수준 유지할 수 있게 돼 신용도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정부 간섭을 우려한 상당수 은행들의 경우 꺼리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고 귀띔했다.

한편, 정부와 금융당국은 경기침체에 따른 신용경색을 풀기 위해 정책금리를 낮추고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했지만 정책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아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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