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일본 속 우리나라 역사문화를 찾아서 1] 왕인신사가 악어신사로 불리는 까닭은?
[연재-일본 속 우리나라 역사문화를 찾아서 1] 왕인신사가 악어신사로 불리는 까닭은?
  • 이상근 문화재환수 국제연대 상임대표
  • 승인 2016.01.04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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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이상근 문화재환수국제연대 상임대표와 탐방단 일행이 일본속 우리 문화재를 탐방하면서 쓴 르뽀]

일본인들이 우러러보는 왕인(王仁)신사 이름이 악어신사라니..

지난 2015년 CAIRA문화재환수국제연대의 두 번째 역사문화탐방은 일본 후쿠오카, 야마구치, 사가현 일대였다. 지난해 8월에는 대마도에서 조선인귀무덤위령제를 봉행하고, 해신신사, 다구두혼신사. 관음사 등 우리 유물의 보관 장소와 유적지를 탐방한 바 있다.

출발은 작년 12월 6일, 오전 9시. 인천국제공항에서 후쿠오카행 비행기로 일행 9명이 동행했다. 일요일 이른 시간임에도 국내선 항공기에는 한국인들로 만원이었다. 
오전 11시, 후쿠오카 공항에서 일행인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와 박경문 전 서경대총장, 그리고 가이드를 만나 일본 최대 야오이 시대 유적지인 사가현 요시노가리 역사공원을 탐방했다. 땅에 웅덩이를 파고 지은 움집이나, 토기, 해자와 목책 등의 유적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청동기, 철기 문화가 일본으로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대규모로 발견된 옹관묘는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발견되는 양식과 동일한 것으로 당시 그 영향이 지대했음을 새삼 알 수 있었다.

▲ <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옹관묘>

이어서 탐방단은 간자키시의 왕인천만궁(王仁天滿宮)으로 갔다. 이 곳은 백제 왕인박사를 모신 곳으로 1796년 이곳에서 ‘왕인천만궁’이라는 돌비석이 발견되면서 왕인박사를 모신 신사를 지었다는 설명이다. 왕인박사는 백제 17대 아신왕 때에 일본 응신천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의 상대포에서 배를 타고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그리고 도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일본으로 가, 일본인들에게 글을 가르쳐 학문의 기초를 세우고 일본가요를 창시, 일본인에게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왕인박사의 묘지는 일본 오오사카 히라카타시에 있으며, 1938년 5월 오사카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일본 역사에 있어서 중요하다.

그러나 탐방단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안내 표지판에 왕인신사 또는 왕인천만궁으로 표기되지 않고 악어(鰐)신사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상히 여긴 탐방단은 일본인 관리인에게 안내문을 달라하고 그 연유를 물었다. 아마 메이지시기에 명칭이 악어신사로 변경, 병기되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관리인은 일본에서 악어의 이미지는 나쁜 뜻이 있으니, 하루빨리 정상적인 명칭인 ‘왕인박사신사’로 되기를 희망한다고 한다.

우리 단체가 향후에 간판과 안내문 변경을 요구하면 주민들의 서명도 받겠다고 적극 호응해, 정확한 연유를 조사하기로 하고 탐방단은 일단 발길을 돌렸다.

박정현 충남도 전 부지사는 조사연구가 끝나면 충남도나 부여군에서 사가현과 간자키시에 공문을 보내는 등, 오기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악어 정현’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 <신사에 걸려 있는 왕인박사 초상화> ▲ 이상근 문화재환수 국제연대 상임대표와 일본속 우리나라 역사문화 탐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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