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 김영삼 전대통령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
"닭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 김영삼 전대통령 '한국 민주주의의 거목"
  • 최은경, 안민재 기자
  • 승인 2015.11.22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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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연합뉴스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가장으로 치르기로 하고 영결식을 26일 오후 2시 국회의사당에서 거행한다. 안장식은 영결식 종료 후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국가장 기간에는 조기가 게양된다.

정부 대표 분향소는 국회의사당에 마련되며, 서울의 기타 지역 및 전국 각지의 분향소는 유가족과 협의해 설치한다.

해외교민과 친분 있는 외국 인사들의 조문을 위해 재외공관장의 결정으로 재외공관 분향소도 설치된다

서거한 김영삼 대통령은 국내외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민주화를 위해 한 평생을 동지이자 적으로 애증을 나누어왔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시절 유신독재 정권에 맞서다 의원직을 잃기도 했다. 김 전대통령의 의원직 제명은 곧 부마항쟁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붕괴의 중요한 시초가 됐다.

김 전 대통령은 군부 독재 아래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1992년 당선된 후 문민 정권을 부활시킨 장본인이다.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과 3당 합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을 결행해 민주세력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오랫동안 척결의 대상으로 삼았던 쿠데타 세력과의 결합을 두고 구국의 결단이라고 주장하면서 합당을 이루어냈으나, 민주주의 진영으로부터 배신자라는 오명을 쓰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통칭 3김(김대중, 김영삼, 김종필)으로 불리기도 하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양김으로 회자되며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로 애증의 세월을 함께 했다.  김 전대통령은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세우며 전면에 나섰으나 김대중 후보에게 역전패하며 패배를 맛봤다.

이후 상도동계(김영삼)와 동교동계(김대중)로 계보 분리, 독재정권 탄압에 맞설때는 함께 힘을 모았으나, 대통령 선거등에 있어서는 대립 관계를 형성하며 야권 분열의 단초가 됐다.

1980년 서울의 봄과 1987년 민주화 이후 등에서 양김의 극한 대결이 바로 그 예로 노태우 전대통령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주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대통령의 정치 이력은 드라마틱하다. 3당합당이후 내각제 파문과 노태우 정부하에서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및 박태준등 쟁쟁한 정적들과 겨뤄 소수파임에도 민자당 대선후보가 됐고, 이후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김 전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된후 문민정부의 기치를 내걸고 비자금 축재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구속하고, 하나회등 정치군인들을 축출했으며, 고위 공직자 비리척결에도 앞장섰다.

금융실명제를 전격적으로 단행했고,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공개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적 개혁은 물론, 옛 조선총독부 철거, 지방자치제 실시등 잇따른 개혁을 이루며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임기막판 친인척 비리,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등을 겪으며 빛을 바래기도 했다.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역사 바로 세우기, 정부 개혁, 정치 부패 척결, 금융실명제로 대표되는 경제개혁, 지자체 실시등 많은 역할을 한 한국 정치사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다.

특히, 군부독재를 청산한 인물로 그의 유명한 "닭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명언에서 보듯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전직 대통령중 한명으로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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