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나는 꿈을 이룬 사람중에 하나다. 어린시절부터 기업인 외에 다른 꿈은 생각해 본적이 없다."
윤홍근 회장은 100여가구가 모여 살던 전남 순천시 풍덕동 파평 윤씨 집성촌에서 2남 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그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지주 집안의 종손이었다.
종손인 홍근 소년은 어린시절 한시간 넘게 걸어서 학교에 갔다. 그 당시 누구나 그렇듯,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를 동여맨체 학교를 향하다보면 느슨해진 보자기에서 책이 쏟아져 나오기 일쑤였다.
어느날, 아버지는 큼지막한 봉투를 내밀었다. 말로만 듣던 책가방과 하얀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세련되고 날렵한 디자인의 책가방은 보물상자처럼 보였고, 운동화는 빛으로 반짝거려 경이 그 자체였다.
소년 윤홍근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런 것은 누가 만들었어요?"
"공장에서 만드니까 공장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럼 저도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이 될래요"
"그래, 기업가는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니 좋은 생각이다"
소년 홍근이 기업가의 꿈을 갖게 된 동기는 아버지로 부터 선물받은 운동화와 책가방이었다.
좋은 제품도 만들고, 많은 사람도 먹여살리는 기업가의 꿈이 마음 한자락에서 용솟음치는 순간이었다.
"집안 풍비박산"..갑자기 찾아온 불운
단란한 가족, 풍족한 생활에서 행복하게 살던 시기도 잠시, 청소년기에 들어선 윤홍근에게 예기치 않은 불운이 찾아왔다.
대학진학무렵, 여수에서 해운업을 크게 확장하고 있던 아버지가 과도한 스트레스에 갑자기 쓰러지면서 10여일만에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빚쟁이들이 찾아와 살벌한 빚독촉이 시작됐다.
결국 1000석의 고향땅을 모두 날리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대학을 포기하기로 했다. 집안은 당연히 반대하는 분위기..그러나, 윤홍근은 돈을 벌기위해 대학포기를 결심했다.
그러던 그가 마음을 다잡고 대학을 진학하기로 했다.
절친한 친구가 "너는 친구들의 우상이다. 나는 장사를 하고 있으니 너는 대학을 가야한다. 내가 뒷바라지를 할테니 대학에 진학해 공부만 열심히 하라".
윤홍근은 그의 제안을 거부했으나, 친구는 윤홍근 대신 조선대학교 무역학과에 원서를 접수했다.
우여곡절 속에 대학시험을 치루고 장학생으로 합격, 친구와 부둥켜 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친구는 대학시절 하숙비를 대신 내주며 뒷바라지를 해주었고, 가족의 끈끈한 사랑과 후원속에 대학을 수석졸업했다.
"교수직을 거절하고 샐러리맨이 되다"
윤홍근은 대학시절 미팅이나 축제등 여느 대학생이면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버렸다.
장학금을 받아야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고, 집안을 일으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으로 윤홍근은 수석졸업을 했다. 교수직을 제안하는 교수님의 제안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사회로 나갔다.
윤홍근의 첫 직장은 미원(현재의 대상그룹). 몇군데 다른 기업에도 합격했지만 미원을 택했다.
삼성의 조미료 브랜드인 '미풍'을 이겨낸 미원의 신화가 인상깊었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새긴 각오는 "샐러리맨이 아닌 사장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자"는 좌우명이었다.
처음엔 단순하게 시작한 결심이었지만 이 결심은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윤홍근은 구매업무부서로 발령받았다. 구매부서는 판매상으로부터 접대와 향응을 받는 자리였다.
그러나, 윤홍근은 이를 거부했고, 오히려 회사비용으로 그들을 접대했다.
판매상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라는 서비스 마인드로 대했고, 판매상은 기존의 관행과는 다른 비즈니스에 감동, 질좋은 물건을 공급하는 계기가 됐다.
이같은 역발상의 사고는 현재에도 BBQ안에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구매능력이 알려지면서 회사에서 윤홍근은 고속승진을 했다.
사원에서 과장까지 보통 8년이 걸리는데 6년만에 과장이 됐다.
이천공장의 총무과장으로 발령받았다. 총무과장은 듣던대로 막강한 자리. 예산배정도 마음대로 하고, 기획, 인사, 회계, 품질관리등 모든 살림살이를 총무과장의 손을 거쳐야 했다.
윤홍근은 여기서 또한번 역발상을 선보인다.
관행을 깨고 정상적인 시스템화를 구축했다. 예산사용 권한을 각 부서에 넘겼고, 공장장에게는 일을 위해서면 필요한 돈을 언제든지 쓰라고 했다.
그리고, 윤홍근은 본 사의 고객인 대리점에 각별한 신경을 썼다.
고충처리센터를 설치해 대리점 사장들의 불만을 직접 접수해 해결했다. 재임기간중 속초, 강릉 지역만 해도 100여번 정도 갔다.
그의 직장생활 얻은 대리점 관리경험이 BBQ에서 가맹점 관리의 원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렇게되자 6개월만에 기존 7천톤을 맴돌던 판매량은 1만톤을 돌파했다.<계속>
<편집부/취재 배원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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