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정책과 한국의 전략
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정책과 한국의 전략
  • 정병국 전 주에티오피아 대사/ 정리=이지연 기자
  • 승인 2022.12.0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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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여름 반도체와 전기차를 양대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는 법을 연달아 입안ㆍ제정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2022년 8월 9일 ‘반도체 및 과학 법’(CHIPS and Science Act, 이하 ‘반도체 법,)과 8월 16일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 IRA)에 각각 서명함으로써, 한국의 역점 첨단산업에 속하는 반도체와 전기차 부문 발전전략에 커다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금번 입법의 주 목적은 ‘Made in America’를 내걸어 밖으로는 중국을 견제하고, 안으로는 국내 산업과 기업들을 보호하면서 얼마 전 11월 8일 실시된 중간선거와 2년 후 치러질 대선용으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반(反) 중국 전략이 정책의 중심에 있는 만큼, 추진 방식도 중국식을 본받아 해당 기업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포함하고 있다. IRA 경우 미 재무부가 북미 산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원함으로써, 북미에 전기차 공장이 없는 한국 차량 제조사들이 차별적 타격을 입게 되어 같은 처지에 있는 유럽연합(EU) 및 일본과 협의하여 미국 측에 시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미 행정부는 의회로 책임을 돌리며 해결을 회피하는 실정이다.

미국은 반도체 법에 더하여 미, 일, 대만, 한국을 포함하는 ‘칩-4’(Chip-4) 기구를 추진하고 있다. 칩-4는 한국, 대만, 일본으로부터 중국 등 우려국에 대한 반도체 제조시설 구축ㆍ확장과 기술 유출을 원천적으로 막으면서, 미국 내 생산기반을 확충하겠다는 전략이다. 이처럼 반도체 문제는 반도체 법에다 칩-4 추진까지 겹쳐 전기차보다 더욱 복잡하고 심각할 것으로 예상되어, 반도체 문제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고 한국이 취할 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법은 이른바 ‘가드레일 조항’(guardrails provision)을 담고 있으며, 그 요지는 상무부와 기금(보조금 지원) 협정을 맺는 기업은 상무장관의 연방 자금지원 결정일로부터 향후 10년 동안 중국과 북한, 러시아, 이란을 포함하는 어떤 다른 ‘우려국가’(country of concern)에서도 반도체 제조역량의 실질적 확장(material expansion)과 관련되는 어떠한 중요 거래(any significant transaction)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게도 이들 우려국가에 대한 반도체 신규 투자나 기존시설 확장 사업이 금지 당하게 된다. 이미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여 미국, EU 등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러시아에 대한 반도체 판매나 진출이 저지된 한국 업체들은 특히 반도체 수출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공장 증설이나 시설 업그레이드도 할 수 없게 되는 추가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미국은 한국에게 칩-4에도 참여하라고 촉구해오고 있다. 칩-4도 반도체 법과 같은 가드레일 조항을 포함할 것이 확실시 되고 있고, 중국은 한국이 칩-4에 가담하면 중국과의 교역과 투자 등에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사드 식 협박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의 대중 수출투자에 타격을 주리라는 위압과 더불어 한국 기업이 부닥치게 될 또 다른 딜레마는 거의 전량 수입에 의지하는 반도체 제조 장비의 계속적 조달 문제이다. 세계 반도체 장비 제조 5대 업체의 2021년 시장 점유율을 보면, 미국 어플라이드 미디어 리얼리스트(AMAT, 노광기를 제외한 모든 장비 제조) 18.6%, 네덜란드 ASML(세계 유일 극자외선 노광기 제작) 18.1%, 미국 램 리서치(LAM Research, 에이퍼 생산장비 제조) 15.0%, 일본 도쿄 일렉트론(TEL, 반도체와 평판 디스플레이 제작) 13.4%, 미국 KLA(반도체 검사 및 측정 장비 제조) 5.9%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만일 한국이 칩-4에 가입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세계 반도체 장비의 대부분을 공급하는 미국으로부터 장비와 반도체 관련 기술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면, 반도체 생산 자체와 반도체 산업 발전이 중단할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은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봉쇄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네덜란드의 ASML에게 반도체 장비의 중국 공급을 규제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11월 22일 리지예 슈라이네마허(Liesjie Schreinemacher) 네덜란드 무역장관은 이를 거부하고 대중 수출을 계속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ASML은 세계 최대 포토-리소그래피(photo-lithography) 장비 회사로서, 세계에서 유일하게 7nm(나노미터) 이하 고급 공정에 필요한 EUV(극자외선) 장비를 제작할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ASML은 2021년 반도체 장비 시장 점유율에서는 18%에 머물지만, 같은 해 반도체 장비 업체 시가총액에서는 $2,860억로 2위인 AMAT 시가총액($126억)의 23배에 이를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이므로,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타격 측면에서 심리적ㆍ상징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회사는 EUV 장비를 중국에 공급하지는 않지만, 수준이 더 낮은 DUV(심자외선) 장비는 수출하고 있으며, 미국은 이 장비의 중국 수출도 차단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미국이 네덜란드에게 반도체 장비 중국 수출을 금지하라고 촉구하고, 후자가 미국의 제의를 거부하게 된 데에는 중국에 대한 반도체 산업 봉쇄라는 목표 외에 다른 정치적 배경도 작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네덜란드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NATO와 EU 회원국들 중 독일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과 러시아 경제제재에 가장 소극적 국가여서 미국에게 편하지 않은 상대이다. Brexit 이후 EU 내에서 독일을 견제할 군사대국 영국이 사라져 EU는 거의 독일 독무대로 변하고, 독일은 게르하르트 슈뢰더(Gerhard Schroder)와 앙겔라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가 미국과 계속 갈등을 빚은 바 있으며, 최근 11월 4일 올라프 숄츠(Olaf Scholz) 총리가 EU의 반대를 무시하고 G7 소속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시진핑을 찾아가, 미국뿐 아니라 서방 전체로부터 빈축을 산 바 있다. EU의 맹주 독일이 미국, 프랑스 등 서방 우방국들의 만류를 도외시하고 경제적 이익을 앞세워 단독으로 중국에 접근하는 것에 편승하여 EU에서 독일에 이어 제2위 무역대국인 네덜란드도 미국의 비위 거스르기를 공공연히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네덜란드가 하는 것을 모방하여 미국에 맞서서 독자노선을 걷기는 힘든 상황이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미국이 결심만 하면, 반도체 제조장비의 안정적 수급이 흔들리고, 기술 도입도 끊어져 당장 반도체 산업이 존폐 기로에 설 수 있고, 미국의 비호를 받는 대만 및 일본과의 제품 생산과 수출 경쟁도 크게 불리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2021년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에서 한국은 19.3%로 대만(9.7%), 일본(6.6%), 중국(6.1%)에 비해 우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미국과 갈등이 불거지면 단기간에 잠식당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미 2022년 3분기 삼성은 대만 파운드리 기업 TSMC에 반도체 수출에서 역전당한 바 있다.

미국에 저항하면서 홀로서기가 어렵다면, 한국의 선택은 미국에 적극 투자하여 반도체 법의 수혜를 이용하면서 칩-4에도 참여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한미 군사동맹을 내세워 반도체 법의 가드레일 적용에서 예외를 얻어내려고 교섭하는 것은 전례로 보아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 상황을 재빨리 파악하여 필요한 요구를 제때 내밀어 실리를 찾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미국 상무부는 물론, 의회와 대통령까지도 동맹국이니 한국에게 상업적으로도 특혜를 고려해 주리라는 착각은 처음부터 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미국의 대외정책 ㅡ 경제뿐 아니라, 안보군사 등 정치적 분야에서도 ㅡ 은 철저히 냉정한 실리주의적 계산에 의해 결정된다. 눈앞의 이익에 집착하여 중국에 대한 미련을 덜어내지 않으면, 우리의 지정학적 가치를 지켜내기 어렵다. 미국과 군사적 동맹관계와 더불어 경제관계도 긴밀히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중국의 압력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깨달아야 한다. 미국의 대외 경제정책은 군사동맹과 같은 안보가 아니라, 저학력ㆍ저소득 백인을 비롯한 유권자를 의식한 포퓰리즘 차원에서 결정되고 집행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칩-4에 참여하면, 중국 측의 반발이 거세어 단기적으로 작지 않은 타격에 직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를 역으로 장기적으로 과다한 무역과 투자의 중국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줄여나가는 기회로 삼는 것이 현명한 길일 것이다. 독일이 긴밀한 교역투자 관계를 통한 ‘접근’이 사회주의 지도자들을 진정한 평화주의자로 ‘변화’토록 할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 아래 에너지 수입과 제 분야 투자ㆍ교역를 장기간 러시아에 과다하게 집중한 결과, 지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미국 민주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미국이 선하게 대하면 러시아도 선량한 시장경제 민주국가로 전환하리라’는 이상주의적 환상에 사로잡혀 순진하고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하였다. 그렇지만 러시아 지도자들에게는 민주와 시장경제로 향하는 개혁은 뒷전이며, 구 소비에트공화국들을 다시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는 재통합의 꿈이 우선이다. 체첸, 조지아, 우크라이나 위기가 그 증거다.

이러한 논리는 중국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우파 기민당(CDU) 소속인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16년 임기 동안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60여 차례나 만나고, 12차례나 중국을 찾아가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남달리 밀착하는 내공을 쏟은 탓에 ‘사회주의 함정’에 빠져, 자국뿐 아니라, 유럽 나아가 세계 전체를 인플레와 겨울 에너지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자신의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가 스관 2개 건설을 통한 러시아산 천연가스 과다 의존과 2008년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NATO 가입 봉쇄에 기인한다는 비판에 대하여, 그녀는 2022년 6월과 10월 이 두 가지 정책이 모두 옳은 선택이었다고 주장하며 책임론을 거부하였다. 물론 그녀의 친러ㆍ중 정책에는 전임 사민당(SPD)의 슈레더 총리와 그녀의 집권 말기 대연정을 구성한 사민당 소속 현 올라프 숄츠 총리(당시 재무장관) 및 현 슈타인마이어(Frank-Walter Steinmeier) 연방 대통령(당시 외교장관)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겠지만, 총리로서 그녀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러시아 및 중국과 70차례 이상 정상회담을 한 사실만으로도 변명의 여지를 찾기 힘들다. 이 모두가 동맹국 미국과 서방 우방국들의 조언과 경고를 무시한 자업자득이었다.

최근 숄츠 총리가 중국 주석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조기에 종료토록 영향을 미쳐, 러시아산 가스 공급 재개를 포함한 난국을 타개할 묘수라도 찾을까봐 서방 우방진영의 경고와 비난을 또 다시 무시하면서 구차하게 홀로 시진핑 주석을 찾는 데 앞장서는 모습은 중국에 대한 높은 경제 의존도를 줄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던져준다 할 것이다.

(위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로 본 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정병국 대사(bkjhung@hotmail.com)는 주 에티오피아 대사와 강원대학교 사학과 강사를 역임하고, 동 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서 문학박사(서양사 부문) 학위를 취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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