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총선과 메르켈 시대의 종언
독일 총선과 메르켈 시대의 종언
  • 장시정 前주카타르대사=정리 이지연 기자
  • 승인 2021.11.01 15: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9월 26일 독일 총선 결과 사민당이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투표 결과는 사민당 25.7 %, 기민당 19.9 %, 녹색당 14.8 %, 자민당 11.5%, 대안당 10.3%, 기사당 5.2%, 좌파당 4.9%로 나타났다. 이 통계치는 정당에 투표하는 제2투표의 결과로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독일 선거에서 정당 간 의석 비중을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이에 따른 의석 분포는 총 735석 중 사민당 206석, 기민당 151석, 녹색당 118석, 자민당 92석, 대안당 83석, 기사당 45석, 좌파당 39석이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민당, 녹색당에 이어 3위에 머물렀던 사민당의 놀라운 반전이다.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몇 가지 특징을 보자면, 우선 기민당의 16년만의 패배이다. 기민당이 상대적 약세를 보였던 4년 전 총선과 비교해도 약 8% 지지를 상실했다. 지역구 의원을 뽑는 제1투표 결과는 더욱 참담하다. 기민당은 4년 전 총 299개 지역구 중 185석을 차지했지만 이번 선거에서 98석으로 줄어든 반면, 사민당은 59석에서 121석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독일 유권자들이 기민당이나 사민당과 같은 거대 정당에는 지역구 투표에, 녹색당이나 자민당 같은 중소 정당에는 정당 투표에 초점을 맞추는 ‘전략적 투표’를 한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매우 심각한 패배이다. 기민당이 그동안 메르켈의 그늘에서 안주해 왔던 결과로서, 이번 정부에서는 야당으로 남아, 변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기후변화 이슈의 한계성이다. 녹색당이 여론 조사에서 줄곧 2위를 하면서 ‘총리 후보’까지 내세웠으나 역시 '기후 정책'만 갖고는 집권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시민들이 아직 기후변화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세 번째로는 좌파당의 몰락이다. 불투명한 잡화상적 정책의 대가로 많은 지지자들을 대안당이나 사민당에게 빼앗겼고, 동독 공산당을 계승한 좌파의 설자리가 극히 좁아졌음을 보여 주었다. 봉쇄 조항의 문턱인 5%를 넘지 못하여 지역구 3석 확보로 가까스로 의회에 진출하였다. 오늘날 사민당을 막연하게 좌파 정당으로 분류한다면 오류일 것이다. 기민당이나 자민당과 오랫동안 연정을 하면서 좌파 정당의 색깔이 크게 퇴색하여 지금은 중도 보수 성향의 국민정당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다. 마지막으로는, 30대 이하의 청년층에서 녹색당이 선두를 차지했고, 이번에 생애 처음 표를 던진 18세부터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은 자민당에게 몰표를 던졌다. 전통적인 보수, 자민당과 기후변화를 강조하는 녹색당이 미래에 득세할 것이라는 전망을 가능케 한다.

이제 관심은 차기 독일 정부의 구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와 누가 총리가 될 것인지에 쏠린다. 독일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특성상 한 정당이 절대다수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연립정부를 구성한다. 전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단독 정부였던 적이 없을 정도다. 우선은 거대 정파인 사민당, 또는 기민/기사연합이 주도하여 다른 2 개 정당이 포함된 3개 정당의 연립 정부가 구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기민/기사연합의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는 선거 당일 저녁 이미 자신의 주도로 연정을 추진할 의향을 밝혔다. 그러나 기민/기사연합이 지난 2번의 총선과 비교하여 크게 지지를 상실하였고, 전통적으로 제1당이 우선적으로 연정 교섭을 주도한다는 점 등 고려시 라셰트의 의도가 실현될지는 불투명하다. 오히려 총리 후보 여론 조사에서 압도적 선두를 차지하고, 이번 총선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올라프 숄츠의 사민당 주도 연정이 성립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연정 교섭에 있어서 좌, 우 스펙트럼의 양편 끝에 위치한 급진적 성향의 좌파당과 대안당은 파트너로서 보통 고려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한 연정 조합은 5 개가 가능하다. 이 중 가장 유력시되는 조합은 사민당이 주도하는 적, 녹, 황의 '신호등 연정'으로서 사민당, 녹색당, 자민당의 조합이다. 두 번째로는 기민/기사연합이 주도하는 흑, 녹, 황의 '자메이카 연정'으로서 기민/기사연합, 녹색당, 자민당의 조합이다. 나머지 3개 조합은 사민당과 기민/기사연합의 대연정이나 여기에 녹색당이나 자민당을 덧붙이는 조합인데, 이미 대연정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굳이 이것을 3개 정당 연립으로 확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따라서 세 번째로 가능한 옵션은 지금과 같은 대연정이다.

우선 '신호등 연정'은 사민당이 기민당과의 연정을 선호하는 자민당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것은 사민당이 자민당에게 많은 것을 양보하여야 함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사민당이 마지노선으로 생각하는 대외정책과 재정정책에 있어서는 그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옵션으로 보인다. 두 번째의 자메이카 연정은 기민당이 녹색당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어떤 양보를 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만, 기후 문제와 최저 임금 등 핵심적인 사안에서 입장 차가 커서 그 장벽을 극복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녹색당으로서는 기민당과 협력한다면 이것은 그간 첨예하게 대립해 왔던 '기후 문제'에서 녹색당 지지자들을 배신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두 옵션이 어렵다면 지금처럼 대연정을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16년간 메르켈 시대의 "business as usual"을 끝내고 변화를 바라는 유권자들의 바램이 기민당의 패배라는 결과로 나타난 이상, 이것은 여론과 동떨어진 선택으로 보인다.

독일의 연정 구성은, '탐색 대화'로 시작하여 대강적인 조건을 협상하고, '연정 협상'으로 세부 사항까지 조율하여 몇 백 쪽의 연정 협약을 맺는 순서로 이루어지는데, 지난 2017년 총선 시 연정 구성에 거의 반년이나 소요되었음을 볼 때 이번 정부 구성도 조기에 매듭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약 연정 협상이 오래도록 난항을 보이면서 의회에서 총리 선출이 어렵게 되면 총리 후보를 지명하는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해 진다. 이 경우 사민당 출신의 슈타인마이어 대통령은 아무래도 숄츠 후보에게 유리할 것이다.

이번 총선을 사민당의 대승으로 이끌면서 차기 독일 총리의 유력한 후보로 떠오른 숄츠는 함부르크 주총리를 지내고 현재 대연정의 재무장관으로서 사민당 내에서도 보수 쪽에 속하는 인사이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에는 연방 노동/사회장관으로서 어젠다 2010 정책의 연장선에서, 특히 단축근로를 도입하여 근로자들을 해고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하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연금 지급을 67세부터 지급토록 하는 법안도 관철시켰다. 그는 NATO와의 협력과 대서양 동맹 강화라는 대외 정책의 큰 틀은 양보할 수 없다고 못 박았는데, 이것은 슈타인마 이어 대통령이 이번 유엔 연설에서 밝힌 독일의 국제적 책임과 유럽의 공동외교안보정책 강화와 맥락이 닿아 있다. 향후 독일 정부의 대외 정책을 예상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보수적인 재정 운용과 최저임금 12 유로, 2045년까지 탄소 중립을 목표로 제시하면서 독일 산업과 경제의 ‘현대화’를 주창하고 있다.

지난 16년간 메르켈 총리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세계 금융 위기, 후쿠시마 사태 와 에너지 전환, 유로존 위기, 난민 사태, 그리고 코로나 사태에 이르기까지 위기관리의 달인이었다는 긍정적 평가가 있는 반면, 중재적인 역할에 치중한 나머지 실질적인 플러스 성과는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특히 노령 빈곤, 교육 투자, 인프라 건설, 주택, 기후 정책 등 측면에서는 실패작이라는 평가이다.

향후 연정의 향배에 따라 구체적인 정책은 달라지겠으나, 우선 차기 정부에서는 메르켈 시대의 종언에 따른 분위기 전환이 불가피해 보인다. 특히 유럽 정책 등 대외 정책 측면에서 마크롱 대통령이 주장하는 유럽의 ‘전략적 자치’에 대한 입장 과 중국 정책의 변화 여부가 주목된다. 유럽연합에서 ‘정부 간 모델’ 대신 ‘다층적 속도의 유럽’을 지향함으로써 브렉시트 이후 유럽 통합 가속화 노력을 지속하겠지만, 유로존 위기, 난민 사태, 노르트스트림 2 가스관으로부터 오커스까지 최근 몇 년 간 유럽연합 내에 팽배해진 분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가 관건일 것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폴크스바겐 자동차만 매년 4백만 대를 파는 독일의 경제 이익 보호를 우선시했던 메르켈과는 달리 대서양 동맹관계 등 보다 거시적 차원에서 기존의 정책 기조를 변경할 수 있다는 관찰이 나온다. 대서양 동맹의 파트너인 미국이 쿼드, 오커스 등으로 중국 압박을 최우선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지난 8월 군함 바이에른호를 중국 해역에 파견하여 미국, 영국과 보조를 맞추어 항행의 자유를 위한 무력시위에 동참한 바 있다.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은 바로 그만큼이나 막강한 정치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고, 그 정치력은 다시 독일의 정당 정치와 선진적인 선거 문화에 힘입고 있다. 독일 선거의 과정이나 제도적 측면에서 우리와 대비되는 몇 가지 시사점을 첨언해 본다.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선거 전 여론 조사의 정확함이다. 여론조사기관에 따라 그 결과가 들쑥날쑥한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번 총선 2주 전부터 9 개 기관이 19 번에 걸쳐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사민당, 기민당, 녹색당의 순위와 지지도가 모두 일치했고, 4, 5위인 자민당과 대안당의 순서가 1% 정도의 차이로 바뀌는 경우만이 산견되었다. 이 여론 조사는 총선 결과와도 거의 일치한다.

독일은 전자 선거를 하지 않는다. 투표는 물론 개표도 수동으로 한다. 독일인들은 평소에 신용카드조차 잘 쓰지 않는다. 개인 정보가 새기 때문이다. 독일 정 당법에 따르면 당 대표를 온라인으로 뽑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반드시 서면 투표해야 하는데, 그만큼 정당이 민주주의에서 갖는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당 대표를 공직 선거와는 달리 온라인으로 뽑는다. 사실 정당의 대표는 웬만한 공직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정당의 선거에 대한 법적 규율이 필요해 보인다.

이번 독일 총선에 며칠 앞서 실시한 러시아 총선에서 부정 선거 시비가 일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우선은 전자 투개표와 사전 투표 문제이다. 러시아와 같이 본 투표를 3일씩이나 하는 것도 사전 투표와 같은 제도적인 취약점을 갖는다. 독일 사람들은 오직 아날로그로, 선거 당일, 하루만 투표한다. 전자 선거와 사전 투표가 외부 세력의 침투와 조작 가능성을 높인다는 비판적 시각이 우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필자의 개인의견이며, 본 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장시정 대사(sjchang81@gmail.com)는 주 카타르대사, 주 함부르크총영사를 역임하였다. 2018년 세종도서로 선정된 『한국 외교관이 만난 독일모델』을 저술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