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몰락과 이범진 공사부자의 구국외교역사를 찾아서
대한제국의 몰락과 이범진 공사부자의 구국외교역사를 찾아서
  • 정태익 한국외교협회고문/ 정리=이지연 기자
  • 승인 2021.10.0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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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과 정동은 한국 근대사 속 러시아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덕수궁은 다른 궁들과 달리 서양식 건축물들이 혼재해 있다. 고종황제는 덕수궁 내에 러시아풍의 건축물들을 세울 수 있게 했다. 이 건물들은 모 두 러시아의 건축가 사비틴이 설계, 건축한 것으로 덕수궁 안에 러시아의 문화가 녹아 있음을 보여준다.

덕수궁 후원에 있는 정관헌은 고종 황제가 세자와 함께 음악을 듣고, 커피를 마시며, 외국 공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연 곳이다.

고종 황제는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 후 이범진과 이완용 등 친러파가 주도한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7시 신변에 위험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궁녀의 가마를 타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사건이 아관파천이다. 대한제국이 이처럼 믿고 의지했던 너그러운 나라 로마노프 왕조 제정 러시아도 1917년 10월 볼세비키혁명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종 황제가 피신했던 러시아 공사관은 1884년 조선 말 조·러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직후에 착공되어 1890년에 준공 되었다. 공사관은 르네상스식의 우아한 벽돌 건물로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이 설계하였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의 영사관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을 덕수궁이 인접한 곳에 두었던 것이다. 해방 후 소련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다가 6.25 전쟁 때 폭격으로 인해 소실되어 현재에는 탑 부분과 지하층만이 남아 있다. 1980년 발굴 조사에 의하면 과거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과 비밀통로가 있었고 덕수궁으로 연결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는 고종이 약 1년간 러시아 공관에 머문 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 후에도 러시아와의 비밀통로를 통해 계속적인 접촉을 하였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고종에게 있어 아관파천은 ‘이이제이’ 라는 불가피한 묘책이었다.

고종은 이 시기에 러시아 웨베르 공사와 협력하여 많은 개혁을 실행하여 대한 제국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아관파천 1년 후인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여 조선이 독립된 제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고종은 대한제국의 외교망을 구축하기 위해 상뜨피터스버그에 상주공관을 설치하고 이범진을 초대 상주공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러시아는 수교 다음 해인 1885년 10월 주한러시아 상주 공관을 설치하고 초대 웨베르 공사를 파견하였다. 한국은 러시아보다 15년 늦게 상주공관을 설치한 것이다. 웨베르 공사와 함께 내한한 손탁 여사는 영어 불어 독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해서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궁내부에서 외국인 접대를 담당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손탁은 한·러 밀약을 추진하는 등 반청운동을 통해 조선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청일전쟁이후 친일정부가 들어서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손탁이 직접 조리하는 요리만 먹었을 정도로 손탁을 신임했다. 조선 정부는 그녀의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하여 1895년 정동 소재의 한옥 한 채 (현 이화여고 자리)를 하사했고, 이는 후에 신축과 증축을 거듭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손탁 호텔이 되었다.

러일전쟁 후인 1905 을사조약 체결 및 헤이그 밀사 사건 후인 1907년 고종 강제퇴위 등을 겪으면서 손탁은 1909년 본국으로 돌아갔고 손탁호텔도 그 운명을 다했다. 결국 손탁은 1909년 보에르에게 호텔을 매각했고 1917년 보에르는 이화학당에 매각하면서 이후 프라이 홀 신축을 위해 헐리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현재 이 자리에는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서있다.

대한제국의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은 1890년부터 1904년까지 대한 제국에서 활동한 건축가로 우리 근대사에 획을 긋는 건축물을 지었고 그 대부분은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 문화재청 주관으로 서울에서 사바틴 특별전시회가 개최된 바 있다. 서울시는 덕수궁 뒤편 주한미국 대사관저 돌담길을 따라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가는 ‘고종의 길’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역사의 흔적을 복원하여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대한제국의 몰락과 이범진 주러공사 부자의 삶의 궤적

필자는 2002년 3월 제 7대 러시아 대사로 러시아에 부임하였다. 부임 즉시 한·러 국민간 다면적 접촉을 촉진하기 위해 기획되고 준비된 한·러 친선특급열사 행사를 실행에 옮겼다.

정치, 경제, 문화, 언론, 사회, 일반 등 각계 인사 300여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이 2002년 7월 14일부터 8월 1일까지 시베리아횡단열차(TSR)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약 1만 킬로미터를 달리며 주요 기착지에 머물며 러측 각계 인사들과 다양한 친선 행사를 펼쳤다. 노신영 전 총리를 비롯한 조건호, 한정길, 이부식 전직 차관 등 관계인사, 송광호, 설훈, 정진석, 최영희, 김경천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 김현택 한국외대 교수, 김진영 연대 교수 등 학자, 추병직 건설교통부 차관 등 정부 대표가 망라된 한·러 친선특급사절단의 다각적 활동은 러시아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깊은 인상과 한국에 대한 호감을 심어 주었다. 열차의 경유지는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 이르쿠추크, 에카테린브루크, 노보시비르스크, 모스크바, 상트피터스부르크 등 러시아 주요 7개 도시였다. 각지에서 2~3일씩 체류하며 주지사 등 러시아 지방정부 인사와의 면담과 기업 상담회 등 공식행사, 사물놀이와 한국 영화제 및 사진전 등 문화행사, 청년포럼 및 축제 등 교류행사가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한·러 친선특급열차 행사는 한·러 외교역사에 전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초유의 대규모 친선외교행사였다. 한·러 국민간 교류 행사는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시베리아횡단열차(TSR)-한반도 종단철도(TKR) 연결의 실현을 목표로 한 장기적 외교전략사업이었다. 동서냉전으로 잃어버렸던 90년 가까운 역사의 공백을 메우고, 한 민족의 대륙적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원대한 비전을 구현하는 대장정이기도 하였다. 특기할 것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우랄산맥 동쪽 도시 에카데린부르크에 머물렀을 때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가족과 함께 비참하게 처형된 자리에 “피의 성당”이 세워져있는 것을 목도한 일이다. 제정 러시아의 황제일가의 비참한 죽음의 현장을 보고 깊은 비애와 역사의 냉혹함을 느꼈다. 한편 그곳은 엘친 러시아 전 대통령 고향이기도 했기에 황제의 죽음과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탄생이라는 기묘한 역사 의 아이러니를 맛보았다.

대미를 장식한 이범진 추모비 제막식

러시아 측에서도 우리의 독창적인 외교 행사에 성의 있는 화답을 하였다. 이그나텐코 러시아 최대 통신사 이타르타스의 이사장이며 한·러 친선협회 회장은 사절단 방문을 푸틴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크레믈 린 극장에서 환영만찬이 열리도록 하는 호의를 베풀었다. 친선사절단은 푸틴 대통령의 환영 메시지가 낭독되고 크레믈린 오케스트라단이 연주하는 공연을 보는 특별한 환대를 기억하고 있다. 2001년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전용열차를 타고 러시아 대륙을 횡단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김 위원장은 대낮에 열차를 타고 각지를 방문하며 엄청난 불편을 야기 시키는 바람에 러시아 일반 시민으로부터 원성을 샀다. 이런 사례를 고려하여 한·러 친선특급열차는 야간에만 운행하여 러시아 일반 시민으로부터 불평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찬사를 받았다.

행사의 백미는 주러 상주공사관이 소재했던 건물에 현판을 부착하는 것과 이범진 주러 초대 상주공사의 추모비를 제막하는 것이었다. 현판 부착식에 이어서 진행된 추모비 제막식은 500여 명의 한국과 러시아 인사가 참여하는 가운데 격식을 갖추어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한국을 대표하여 주러 대사인 필자가 러시아를 대표하여 상트피터스부르크 부시장이 각각 추모사를 하였다. 추모비의 좌우에 서있는 소나무와 자작나무는 행사를 지켜보며 한·러 양국의 우호의 상징물을 증거하고 있을 것이다.

추모비는 대한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던 풍운아 이범진 공사의 비극적 생애에 대한 위로와 구국외교선열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한·러 우호를 다지는 영원한 기념물로 남아 있다. 이제 현판이 있는 장소와 추모비가 서 있는 공동묘지는 러시아를 방문하는 한국인들에게 관광 필수코스가 되어있다.

장남 기종 고국에 남기고 차남 위종과 국제외교 무대서 활약

이범진의 본관은 전주(全州) 이씨, 자는 성삼(聖三)이다. 그의 부친 李景夏(이경하)는 조선왕조 무관으로 병인양요 때 로스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이범진은 1879년(고종 16년) 식년과거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명성황후의 후원으로 궁중에 출입하였고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친일 내각을 구성하여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위기를 느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는 이범진, 이완용을 입각시켜 친러 내각을 구성했다.

이범진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 재조사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주미 공사로 임명되어 1896년 7월 제물포에서 프랑스 군함을 타고 미국 워싱턴으로 떠나 3년간 머물렀다. 1899년 7월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어 1900년 부임지인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가한 대한제국의 공식행사를 주관하였고 1901년 다시 러시아 공사에 임명되어 일본을 견제하는 외교적 역할을 부여받았다. 고종의 짜르 앞 밀서를 전달하며 러시아의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러시아는 일본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보호에 소극적이었고 만주 지역의 이권사업에만 관심을 두었다.

1904년 2월,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패권을 다투던 러시아와 일본 간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전쟁기간 중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하였으나 러시아에 유리하도록 숨은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러시아가 패전하여 조선에서 러시아 세력이 몰락하자 이범진은 러시아에서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박탈되었고 주 러시아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1907년 고종은 이범진을 통해 국제 사회에 조선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을 밀사단에 포함시켜 정사 이상설, 부사 이준을 도와 헤이그에서 활약하도록 하는 등 밀사단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0년 한·일 합방이 공표되자 이범진은 1911년 1월 13일 눈 덮인 추운 날 정오 자택 거실에서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천장 램프에 목 메달아 자결하였다. 그는 고종 황제에게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고 자살이외에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라는 유서를 남겼다. 당시 망국 외교관의 비통함과 절망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결 전에 장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관을 주문하고 그 시신을 블라디보스토크로 운반해 주길 요청하며 장례비용을 미리 지불했다고 한다. 현지 신문 달료카야 오크라이나는 “이 사건은 슬픈 한국 서사시의 비극적 결말” 이라고 평했다. 이를 보고 받은 니콜라이 2세 황제는 태극기가 덮인 관을 안치한 흰 마차를 6필의 백마가 끌고 수도 근교의 공동묘지가 있는 장지로 이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시 조촐하지만 엄숙한 망국 외교관의 장례식을 촬영한 3분짜리 영상 자료가 러시아 정부 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 당시 이범진 공사를 기억하는 외교 사절들의 운구 행렬 장면이 인상적이다.

1905년 러시아 놀껜 남작 딸과 결혼한 헤이그 밀사 이위종

다음으로 이범진 공사의 아들이자 헤이그 밀사단의 일원으로 외로운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위종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자.

1907년 당시 고종황제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제 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단을 파견하여 을사조약 체결의 부당성과 대한제국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명의 특사단은 러시아의 변심과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후 일본은 특사 파견을 문제 삼아 고종을 협박, 퇴위를 강요하였다. 이로써 필사적으로 대한제국을 살리고자 했던 고종황제의 외교적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낯선 러시아 땅에 홀로 남은 이위종은 망국의 설움을 처절하게 느꼈을 뿐만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자강하지 못하면 국제정치의 희생물이 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이범진 공사는 자손 보존을 위해 장남 이기종을 한국에 남겨둔 채 차남 이위종만 데리고 주미공사로 4년을 생활했다. 이후 러시아 주재공사로 부임하기 위해 파리를 경유할 때 이위종을 파리 소재 초등군사학교에 입교시켰다. 졸업 후 쌍빼쩨르부르그의 부친에게 돌아온 그는 공사관 1등서기관으로 일했다. 외교관이 된 것이다. 1905년 11월 12일 이위종은 놀껜 남작의 딸인 바로네사 엘리자베따 놀껜과 결혼했다. 세 명의 딸을 자손으로 남겼다.

1919년 모스크바에서 항일투쟁 촉구 연설 이후 행방 묘연

부친의 자살로 큰 충격을 받았던 이위종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사료가 있다. 부친의 사망 직후 그가 니꼴라이 2세에게 보낸 진정서가 그것이다. 이위종은 부친의 사망으로 물질적, 정신적 기반을 한꺼번에 상실했다고 애통함을 밝히며, 부친의 사망 이틀 뒤인 1월 15일 짜르 황제에게 진정서를 보내 장례비 500루블만이라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니꼴라이 2세는 러시아 외무부를 통해 이 돈을 즉각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이위종은 러시아 국적 취득에 이어 세습귀족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얻게 되었다. 그는 1919년 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한국해방지지결의 대회에서 “러시아와 시베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 주축으로 한국인 부대를 창설하여 최우선으로 시베리아와 한국에서 일본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러시아 정부에 호소하자”고 열변을 토했다고 한다. 기록은 없지만 이위종은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의 외국 간섭군과의 전투에 참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전선에서 최후를 마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부친 이범진 공사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적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모스크바대 사학과 재학 외고손녀가 이위종 연구의지 밝혀

옛 공사관은 러시아 황궁 근처에 있었는데, 위치가 좋아서인지 지금은 호텔로 변해 있었다. 건물에는 러시아 혁명의 주역 레닌을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거주했던 기록이 남아있었다. 러시아의 많은 명사들이 거쳐 간 유서 깊은 건물에 특정한 한국인을 위해서 기념현판을 부착하는 것이 곤란하다는 것이 상트 시청 관계자의 공식 입장이었기 때문에 난관에 봉착했다. 할 수 없이 대사인 내가 직접 나서서 서울과 평양 방문을 앞두고 있는 야코블레프 시장과 담판하여 기념현판 부착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필자는 이범진 공사의 비극적인 생애에 대해 설명을 하고 특별허가를 요청하였다. 야코블레프 시장은 깊은 심적 쇼크를 받고 한국 방문 후 현판 부착 허가 조치를 취해 주었다.

이범진 공사가 묻힌 공동묘지는 매장기록부를 통해서 찾아냈다. 매장기록 명단에서 Prince Bum Lee를 찾아낸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역사적 변란을 수없이 겪으며 수많은 사람이 겹치기로 매장되는 바람에 이범진 공사의 묘지를 특정해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공동묘지 터에 부지를 마련하여 추모비를 세우는 방침을 결정했고 이에 따라 보훈처가 추모비를 제작하였다.

나아가 주러 한국대사관은 이위종 서기관이 남작의 딸과 결혼하여 딸 셋을 두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가족계보를 추적한 끝에 마침내 증손녀 루드밀라 가족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필자는 그녀를 대한민국 독립운동 유가족 명단에 올리도록 조치했다.

“우리 조상 중에 이렇게 훌륭한 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감격했습니다. 앞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살겠습니다. 고귀한 혈통을 찾아 주신 한국대사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루드밀라 여사가 필자에게 했던 말이다. 이후 그녀는 필자를 만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국가 보훈가족이 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소정의 보훈금도 지급받게 되었다.

이범진 공사 추모비 제막식에서는 이범진 공사의 큰 아들인 이기종의 증손자인 이원종과 둘째 아들 이위종의 외증손녀인 루드밀라가 만나는 슬프고도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한국과 러시아에 떨어져 살며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혈육이라는 인연으로 제막 행사에 함께 참가하는 인간 드라마는 격세지감을 자아내는 감격적 울림을 주었다.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묘지의 흙이라도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습니다.”

유족들이 이렇게 말하고 흙을 보자기에 담아가는 장면은 행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눈시울을 적시게 했으며 역사가 만든 비운을 생각하며 모두의 마음을 숙연케 하였다.

“이위종에 대한 연구를 하겠습니다.”

자리를 함께 했던 모스크바 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인 이위종의 외고손녀인 에브게니아가 한 말이다. 그녀의 다짐은 행사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명제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였다.

기억을 통해 역사는 ‘순간’을 넘어 ‘영원’으로 남는다.

국가의 주권은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으로 정의된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은 외교권 상실을 초래한 문서이기 때문에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정신이 있는 모든 한국 사람의 분노와 분기의 대상이다.

의열투쟁은 자신의 한 목숨을 던져 민족의 의사를 밝히고, 정의와 인도주의를 실현하고, 사회와 역사의 물줄기를 올바른 방향으로 바꾸는 행동이다. 대한제국의 소멸은 민영환 주러 초대 공사와 이범진 주러 초대 상주공사가 자진하는 비극을 낳았다.

특정 국가나 민족이 제국건설과 문명전파를 구실로 올바른 역사의 흐름을 거스를 때 인류와 사회의 비극이 초래되었다. 우리 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범진 러시아 초대 상주공사가 일제의 외교권 강탈에 치열하게 저항하다가 목숨을 바쳤다. 국익의 최일선에서 근무하는 외교관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당면했을 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귀감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범진 공사와 이위종 부자의 구국충정이야말로 가깝게는 일제침략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고, 멀리는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의지의 발현인 것이다. 두 분의 구국외교는 우리 민족분만 아니라 러시아인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기억을 통해 역사는 ‘순간’을 넘어 ‘영원’으로 남는다.”는 말과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역사로부터 처벌받게 된다.”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의 극복은 오직 역사를 통하여, 즉 새 역사를 창조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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