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의 러시아 역할 재조명: 신북방정책 추진계기 한·러 관계 새 지평 모색 필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서의 러시아 역할 재조명: 신북방정책 추진계기 한·러 관계 새 지평 모색 필요
  • 김재범 前주우루과이대사/ 정리=이지연 기자
  • 승인 2021.09.16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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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 미국 대북특별대표가 지난 6월에 이어 2개월만인 8월 21~24일간 재방한했다. 이번 김 대표 방한의 특징은 한미 연례후반기 연합지휘소훈련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가운데 러시아 대북수석대표인 이고리 마르굴로프 외교부 아시아태평양차관의 8월 21~26일간 방한과 중복되었던 점이다. 한·미 양국정부는 이 기회에 한·미·러 3자 협의를 갖기 희망하였으나, 러시아가 대북한 관계를 고려해 이에 응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러 및 미·러 양자협의에 일정한 성과가 있었고 앞으로 3국이 워싱턴, 호놀룰루, 모스크바 또는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 3자 협의를 개최할 수 있을 것이므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의미 있는 진전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역할이 재조명될 수 있다.

외교부는 노규덕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마르굴로프 차관이 8월 24일 회담에서 “최근 한반도정세 전반에 관해 심도 있는 의견을 교환하고,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정착에 진전을 가져오기 위한 한·러 간 협력방안을 논의했다”면서, “마르굴로프 차관이 한반도 및 역내정세 안정의 중요성과 북·미 및 남·북 대화를 포함한 관련국들 간 조속한 대화 재개 필요성에 공감을 표하고 이를 위한 우리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함과 아울러 러시아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건설적 역할을 수행할 의향을 재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마르굴로프 차관이 2018년 12월 방한하여 이도훈 당시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협의한 내용으로부터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이나, 마르굴로프 차관이 노 본부장을 러시아로 초청했으므로 향후 양자 간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러시아의 건설적 역할을 가시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 이유는 세계 각 지역에서 세력균형을 추구해온 미국의 전통적인 범세계 전략 및 대외정책의 근간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은 중국이 범세계적 패권을 장악함은 물론이고 아시아의 맹주로 행세하는 현상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중국의 급부상과 미중대립의 격화에 대처하고 있는 미국은 동맹국 및 우방국은 물론 중립국이나 기타 다양한 성향의 국가와의 협력도 필요로 하고 있다. 탈냉전시대에 정착됐던 ‘서방 대 여타(West vs rest)’의 대립구도가 탈세계화시대에 들어 ‘중국 대 여타(China vs rest)’의 형태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돈바스지역을 둘러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간 긴장이 고조되던 금년 4월 바이든 대통령이 제3국에서 서로 만날 것을 푸틴 대통령에게 제안하여 6월 16일 제네바에서 전격적으로 개최된 미·러 정상회담도 동일한 맥락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미·러는 정상회담 결과 양국관계에서 획기적 돌파구나 일대 타결에 도달하지는 못했으나, 세계 양대 핵강국 사이에 수년간 중단되었던 대화의 틀을 복원키로 합의하고 상호간의 협력가능성 및 금지선(red line)을 확인함으로써 양국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규칙을 확인한 중요한 의미가 있었으며, 양 정상 모두 회담이 건설적이었다고 평가했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상하이를 방문하여 1972년 2월 27일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국무원총리와 함께 공동성명에 서명한 것이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손을 잡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바와 같이, 바이든·푸틴 회담은 미국이 대러시아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중국과의 패권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자 하는 전략에 기인했다고 해석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를 G8로 복귀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했던 사례에서도 미국의 이와 같은 정책성향을 이미 극명히 보여줬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바이든·푸틴 회담에서 미·러 양국은 (1) 상주대사의 주재지 복귀, (2) 전략적 안정을 위한 협력, (3) 사이버범죄 방지를 위한 공동대응 관련 실무협의 진행 등 양측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의제에서 일정한 합의를 이뤘다. 특히 양국은 전략적 안정을 위한 협의경로를 복원하고 5년 후 종료될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에 대한 대체방안도 전략대화의 틀 안에서 협의하기로 합의했다. 그밖에도 (1) 이란 핵협상 및 아프가니스탄 문제, (2) 상대국에서 복역 중인 수감자 교환문제 협의, (3) 북극 협력, (4) 교역 확대 등이 논의되었으며, 푸틴 대통령은 이란 핵문제와 아프가니스탄 테러리즘과 관련한 바이든 대통령의 협조요청에 대해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반해 양측은 (1) 돈바스지역 분쟁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문제, (2)벨라루스 문제, (3) 나발니 문제, (4) 시리아사태에 대한 해법 등에 관해서는 서로 이견만 드러냈다. 그러나 정상회담 성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우크라이나문제에 대한 바이든 대통령의 강력한 입장표명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을 살펴볼 때, 미·러 관계의 앞길이 비교적 선명히 드러난다. 양국은 유럽 및 중동 지역에서 이해관계가 예리하게 대립하는 반면, 극동지역에서는 많은 부분 합치되어 상호협력의 지평이 확대될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과거 미국이 인도의 핵보유를 용인하고 양국 간 전략적 협력구도를 설정했던 예와 같이, 러시아에 대해서도 유럽에서는 제재를 계속하면서도 극동지역에서는 상호협력을 긴밀화할 수 있을 전망이다.

우리 정부는 이상의 정세변화에 부응하여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및 신북방정책 추진과정에서 러시아의 역할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미ㆍ러 관계의 악화 및 중ㆍ러의 밀착이라는 정세구도 하에서 신북방정책 추진 및 북핵문제 해결을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추진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제 미·러 양국이 정상회담을 통해 공동이익이 있는 국제문제에는 상호 협력할 것임을 분명히 했으므로 미·러 관계의 안정화가 우리나라의 외교환경에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므로 북핵문제에 관한 미ㆍ러의 협력구도를 창출하기 위한 정부의 선제적 전략구상이 요구된다.

미·러 정상회담은 바이든 행정부가 강조한 바와 같이 양 핵강대국 간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관계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는 한편, 향후 미국이 대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해 대러 관계를 안정화시킴으로써 ‘러시아 변수’의 최소화를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진 것이다. 중국정부는 미·러 정상회담을 ‘중·러에 대한 이간책’으로 지목하는 즉각적이고도 예민한 반응을 보인 바 있다.

정부는 이상과 같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부응하여, 서울-평양-셴양을 철도 및 도로로 연결하려는 계획을 당분간 보류하는 한편, 남북한과 연해주를 연결하는 제반 협력사업계획을 우선적으로 개시할 필요가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성 김 대표와 마르굴로프 대표 간의 회담이 커트 캠벨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 인도태평양조정관과 알렉세이 체쿤코프 러시아 극동개발부장관 간의 협의로 발전되기를 희망한다.

한·러 양국은 철도, 도로, 송유관, 가스관, 송전망 등을 연결하는 계획을 공동으로 추진하려고 했으나 북한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우리나라의 경제규모는 작년에 러시아를 추월했다. 미·러 정상회담 이전인 3월 23~25일간 서울에서 개최된 한·러 외교장관회담에서만 하더라도 이 문제에 관한 협의는 조선분야 협력, 우리기업들의 연해주 산업단지 조성을 포함한 「9개다리」(철도, 가스, 전력, 항만인프라, 북극항로, 조선, 일자리창출, 농업, 수산) 등 원론적 협의에 머물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남북한, 미국 및 러시아가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이런 계획을 시행하거나 한·미·러가 북한을 상대로 공동사업을 벌이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금강산관광사업도 재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사업대상지를 원산 관광단지, 마식령스키장, 갈마해수욕장, 칠보산, 나진·선봉지구 등으로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해 북극해로 개척을 위한 이 4자간의 공동사업도 함께 추진해볼만하다. 2000년대 초 서부전선에서 2차례의 연평해전이 벌어지는 동안 동해안에서는 함경남도 금호지구에 경수로 2기를 건설하기 위한 물자 및 인원이 평시와 마찬가지로 유유히 내왕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도권 인근으로부터 북한을 경유하여 중국에 이르는 사업에는 국가안보적 위험요인이 심대한 반면, 동해안을 따라 북한을 거쳐 러시아로 연결되는 협력 사업은 타당성이 비교적 높다.

이와 같은 사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물자 및 인원의 북한통과는 물론이고 북한 근로자 고용 및 북한산 자재 구매 등이 수반될 것이므로 한미양국이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북제재로부터 예외적으로 면제조치를 취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비핵화를 촉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러시아와 북한은 중국의 동해진출을 저지하기 위하여 두만강 하구의 협소한 국경지대에서 서로 오랫동안 굳게 손잡고 대두만강개발계획(GTRDP)이나 창치투(長春·吉林·圖們)개발계획 등 동북진흥계획에 대한 중국의 막대한 투자 유혹도 단호히 뿌리쳐온 사실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과거 4자회담 제의에 대한 북한의 대답은 “4자회담을 거치지 않고 직방으로 6자회담에 참여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 하에 조선로동당 창설, 조선인민군 건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 등을 거쳐 6.25 전쟁을 일으켰고 실험용 원자로를 도입했다. 또한 1960년대 중소분쟁에 따른 주체사상 표방이나 소련방 해체 이후뿐 아니라 현재까지도 북한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시각에서 한반도 주변의 소위 4강 가운데 러시아의 영향력이 다른 3개국에 비해 지속적으로 축소되어온 것은 중국의 급부상에 따른 착시현상일 것이다. 우리나라로서는 세계최대 핵보유국이자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및 신북방정책 추진과정에 적극 협력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교섭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물론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한 러시아의 역할에는 한계가 분명하므로 위와 같은 노력이 단시일 내에 성과를 거두기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서방으로부터의 제재국면은 차치하고라도 러시아 대외정책의 특성은 자국의 핵심이익에 직관되지 않는 일에 간여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타국에 비해 강하다. 그러나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러시아의 기여를 적극 유도하고 그 진전 상황에 비례하여 추진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대북제재에 대한 예외조치를 러시아에게 부여하면 중국도 대북제재를 경쟁적으로 완화하려 할 가능성도 우려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중국이 북한 비핵화의 진전을 위해 기여한 만큼만 예외조치를 인정해주고 위반 시는 가차 없는 제3자 제재(secondary boycott)를 가해야 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시베리아횡단철도(TSR) 등 동해안에서의 협력 사업이 순조롭게 진전되면 중국횡단철도(TCR) 등 서부지역을 통과하는 사업도 비로소 개시할 수 있을 것이다.

*  편집자 주: 필자 개인의견이며,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김재범 대사(jaebum50@naver.com)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정책·북한부장, 주우루과이 대사,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외교특임교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한미협회 상근부회장, 국제정책연구원 부원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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