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칼럼니스트 [ 변연배의 와인과 함께하는 세상 65 ] 좋은 와인과 좋아하는 와인
와인칼럼니스트 [ 변연배의 와인과 함께하는 세상 65 ] 좋은 와인과 좋아하는 와인
  • 변연배 칼럼전문기자
  • 승인 2021.05.13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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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빌린의 역설(Abilene Paradox)’이라는 것이 있다. 조지 워싱턴대 교수이자 경영 컨설턴트인 조지 하비 교수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오후 텍사스 주 콜맨에 있는 처가를 방문했다. 처가 식구들은 선풍기 앞에 모여 느긋하게 도미노 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장인이 처가에서 100km나 떨어진 애빌린(Abilene)이라는 곳으로 식사나 하러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 말을 들은 하비 교수의 아내도 좋은 생각이라고 거들었다. 하비 교수는 날씨도 더운데 그렇게 먼 거리까지 운전을 해서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장인과 아내가 좋아하는데 혼자서만 반대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자기도 좋다고 했다. 그리고 내친김에 장모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했다. 그러자 장모도 “물론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애빌린으로 가는 차안은 무지 더웠고 교통체증에다 먼지까지 날려 큰 고역을 치렀다. 그리고 식당에서 나온 음식도 최악이었다. 일행은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들 중 한사람이 여행이 아주 즐거웠다는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자 장모가 사실 자신은 집에 있고 싶었는데 세 사람이 가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 나섰다고 속마음을 밝혔다. 이어 하비교수도 애초에 자기도 애빌린에 가고 싶지 않았는데 다들 가고 싶어하니까 자기도 그렇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하비교수의 아내도 남편이 좋아하는 것 같아 따라갔다고 했다. 세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장인이 말했다. “가족들이 게임을 지루해하는 것 같아 나도 그냥 한번 물어본 것인데 다들 좋다고 하니까 그냥 따라갔지...” 

결국 가족들 중에 누구도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느라 더운 여름날 생고생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사회 심리학에서는 ‘집단사고’ 혹은 ‘다원적 무지’ 라고 한다. 종종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생각이 달라도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거나 혹은 집단의 생각에 반대하는 경우에서 오는 사회적인 불이익이나 반발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를 꺼려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의 생각에 동조한다. 이 이론은 기업에서의 효과적인 의사결정을 위해서도 자주 인용된다. 

주로 여론이나 사람들의 정치적인 견해 표명에 관련된 것이지만 커뮤니케이션학에서 나오는 ‘침묵의 나선’ 이론도 비슷한 경우이다. 일반 대중들은 특정한 의견이 다수의 사람들에게 지배적인 의견으로 인정되고 있다면 반대의견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은 고립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침묵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선거에서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애빌린의 역설은 여러 사람이 같이 식당에서 음식이나 와인을 고를 때에도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일행 중 누구도 화이트 와인을 원하지 않는데 소믈리에가 관행적으로 권하거나 혹은 일행 중 한 사람이 의미없이 이야기해본 것을 그냥 좋다고 따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와인을 테이스팅한 후 맛과 향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자주 나타난다. 맛과 향에 대한 느낌은 사실 주관적인 면이 많아 같은 사람도 매번 다르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느낌이 다른 사람과 다를 것 같은 두려움에 자기가 실제로 생각한 느낌을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표현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와인 라벨에 맛에 대한 설명이 있는 경우나 일행 중 소위 와인 전문가라는 사람이 있으면 특히 표현을 머뭇거리게 된다.  
 

‘좋은 와인’과 ‘좋아하는 와인’은 다르다. ‘좋아하는 와인’은 마시는 사람의 기호나 주관에 따른 것이라 기본적으로 시비가 있을 수 없다. 그냥 좋다면 좋은 것이다. 음식이 맛있다고 하는데 왜 맛있냐고 물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좋은 와인’은 어떠한 형태이든 평가가 전제가 된다. 그것도 그러한 평가가 보편적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만해야 한다. 그런데 와인이 좋고 좋지 않은 것은 누가 평가하는가? 그리고 그들의 평가는 믿을 만 한가?   
 
이 질문과 관련하여 2009년 월스트리트 저널이 보도한 몇 가지 의미 있는 연구와 그 배경을 소개한다. 1973년 프랑스 세무당국은 샤토 코뱅, 샤토 몽테카네 등 여러 와이너리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역사가 150년이 넘는 보르도의 유서깊은 와인 생산 및 유통업자인 크루즈 패밀리가 운영하는 회사를 급습했다. 

재판 과정에서 드러난 내용을 보면 이 회사는 주로 외국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사기를 쳤다. 저급와인을 담은  대형 보관 탱크에서는 “보졸래 와인으로 이름 붙여 미국 시장에 판매하기 좋음”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공급자 위주의 품평 및 유통과정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고 이러한 분위기는 미국의 변호사였던 로버트 파커가 소비자 입장에서 독립적으로 와인을 평가하는 100점 척도의 평가시스템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78년에는 와인 평론지인 Wine Advocate지를 창간했다.    

지금은 공식적으로 은퇴했지만 그후 로버트 파커는 세계 와인 산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버트 파커의 취향에 맞춰 와인을 양조하는 것을 지칭하여 ‘파커화(Parkerization)’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2009년 현재 미국에서만 29개의 와인 품평회가 존재했는데 여기서 메달을 수상한 와이너리들은 와인 품평회를 위해 평균 백만달러가 넘는 비용을 사용했다. 보르도 와인에 대한 2001년의 한 연구를 보면 로버트 파커가 평점 1점을 높게 주는데 따라 와인 가격이 평균 7%나 뛰었다.

전 세계 200만개 정도로 추정되는 와이너리에서 생산하는 수천만 종류의 와인 중에서 업계의 전문가가 이를 사전에 평가하고 선별하여 소비자에게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동일한 전문가가 동일한 와인을 놓고, 평가할 때마다 그것도 큰 폭으로 평가결과가 달라진다면 문제는 다르다. 

베를린 홈볼트 대학의 은퇴한 교수로 과학자이자 통계학자로서 동시에 와인 생산자이기도 한 로버트 호지슨의 연구는 소위 와인 평론가라는 사람들의 평가 신뢰도에 심각한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연구결과는 와인을 좋아하지만 와인 테이스팅에 자신감이 없는 대다수의 일반 와인 소비자에게도 커다란 위안을 준다. 

사실 호지슨 교수의 연구 외에도 와인의 맛을 제대로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연구는 의외로 많다. 대표적으로 1996년 발간된 ‘실험심리학 저널(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에 실린 연구를 보면 특별히 훈련된 와인 테이스팅 전문가들도 3개에서 4개의 맛이 섞여 있는 경우 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보통 이들은 와인 평론을 할 때 이를 테면 딸기, 라벤더, 블랙 베리 맛… 등 6가지 이상의 맛을 나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먼지 냄새, 민트 향에 뒤따르는 분필 냄새가 나고, 자두 향, 담배 냄새, 가죽냄새, 그리고 오크통의 냄새가 배어 있는 맛있는 체리 향이 남.” Wine.com에 실린 와인 평론가의 2005년 빈티지의 한 나파 와인에 대한 평가이다. 그런데 똑 같은 와인을 두고 Wine Advocate지는 이렇게 평가했다. “확실한 라벤더 냄새가 나고, 구운 허브, 블루베리 향, 블랙 커런트 향이 남.” 이라고 했다. 8가지 맛과 4가지 맛으로 각각 평가한 두 권위있는 와인 평론지의 평가에 겹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도 신기하다.  
       
30년전의 하버드 대학의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5종류의 와인에 대해 탄닌, 당도, 과일 향 등 12개 항목의 특징을 두고 전문가에게 평가를 의뢰한 결과 12개 항목 중에서 특징이 확연히 드러나는 3개 항목 정도만 의견이 일치했다. 1963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연구결과는 더 회의적이다. 연구자들은 비밀리에 프랑스 소테른 지역의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에다 세리주, 로제 와인, 보르고뉴 및 보르도 와인을 섞어 색깔을 입혔다. 그리고는 와인 전문가들에게 모의 실험용으로 다양하게 만든 여러 종류 와인의 당도를 평가하게 했다. 결과는 아무도 와인이 혼합된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평소에 그들이 마시는 정상적인 와인의 범주내에서 맛을 평가했다.   

또 프랑스의 와인 연구가인 프레데릭 브로쉐는 중급의 보르도 와인을 하나는 비싼 그랑 크뤼 병에다 넣고 다른 하나는 값싼 테이블 와인 병에 넣었다. 57명이나 되는 전문가들의 평가는 압도적으로 그랑 크뤼 병에 든 와인이 아주 훌륭하다고 평가했다. 반면 테이블 와인병에 든 와인에 대해선 맛이 밋밋하고 균형감이 없다고 혹평을 하였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호지슨 교수의 연구는 다른 연구와 차별되는 되는 점이 있다. 다른 연구가 실험실에서 행해진 연구라면 호지슨 교수의 연구는 실제로 본인이 4년간 와인 품평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매년 70여명의 심사위원이 100여 종류의 와인을 이틀간 심사한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한 점이다. 

연구 결과는 놀라웠다. 똑 같은 병에서 따른 똑 같은 와인을 각 심사위원이 세번에 걸쳐 시음하여 80점~100점 사이의 점수를 주게 하였는데, 예를 들어 87점, 91점, 95점과 같이 평균적으로 위 아래 4점 정도의 편차가 발견되었다. 이는 실제적으론 20점 만점의 평가척도에서 평균 최대 8점의 편차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그는 더 나아가 출품된 와인이 품평회에서 입상할 확률을 통계학적인 관점에서 좀더 세밀히 분석하였는데 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입상한 와인들의 분포가 넓어 한 품평회에서 입상한 와인이 다른 품평회에서 입상하지 못할 확률이 91%나 되었다. 이 말은 무작위로 뽑은 어떤 와인이라도 각각 9% 정도의 입상 확률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파소 노블레스에 있는 한 와인 생산업자는 같은 와인을 담은 병 3개에다 각기 다른 라벨을 붙여 한 품평회에 보냈는데 하나는 품평 자체가 거절되었고, 하나는 “마실 수 없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3번째 병은 금상을 받았다.

로버트 파커는 스스로 자신의 평가 오차가 100점 만점에 2~3점 이내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위 에서 언급한 비슷한 테스트에는 응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 혀의 표면과 입천장에는 수천개의 미뢰가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미뢰는 50~150개의 미각세포를 가지고 있다. 미뢰는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의 5개 기본 맛을 감지한 후 뇌의 정해진 부분으로 정보를 보내 정확하게 각각의 맛을 구별한다. 하지만 맛은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의 감각에 따라 차이가 크고 주관적이다.

와인에는 아로마나 부케 같은 복잡한 향과 함께 온갖 맛이 어울려서 와인에 대한 전체적인 감각을 구성한다. 단맛, 신맛, 쓴맛, 짠맛과 같은 기본 맛은 물론이고 떫은맛이나 과일 맛, 흙 맛, 바닐라 맛과 같은 부수적인 맛에다 시음자의 생각과 상상이 빚어내는 주관적인 맛도 포함되어 있다.

스스로 느끼는 맛이 그 와인의 실제 맛이다. 끝. 

 


■ 와인칼럼니스트 변연배

▣ 경력
ㆍ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임원/경영학박사(현)
ㆍCoupang 부사장ㆍDHL 부사장
ㆍMotorola 아시아태평양지역 인사담당 임원
ㆍHI Solutions, Inc. 대표이사
ㆍ두산 Seagram㈜ 부사장
ㆍ주한 외국기업 인사관리협회 (KOFEN) 회장
ㆍ연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ㆍ중앙공무원 연수원 외래교수
ㆍ칼럼니스트
ㆍ와인 바/ 와인 관련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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