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칼럼니스트 [ 변연배의 와인과 함께하는 세상 61 ] 와인 잔
와인칼럼니스트 [ 변연배의 와인과 함께하는 세상 61 ] 와인 잔
  • 변연배 칼럼전문기자
  • 승인 2021.03.18 08: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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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Side Ways”를 보면 이혼한 전 부인과의 재결합 희망이 깨진 주인공이 보르도 생테밀리옹의 특급 와인인 샤토 슈발블랑 1961년산을 패스트푸드 식당에 가져가 햄버거를 안주삼아 마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마시는 잔이 일회용이다. 1961년 빈티지의 샤토 슈발블랑은 보관상태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현재 300만원에서 1000만원까지 값이 매겨지는 고가의 와인이다. 

크게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마시려고 주인공이 아껴 두었던 값비싼 와인인데 테이블에 올려 놓지도 못하고 종업원의 눈치를 보면서 마시는 주인공을 보면서 짠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저렇게 귀한 와인을 일회용 잔에다 마실까 하는 안타까움이 더 클 것 같다. 

잔을 발명하기전까지 인류는 액체로 된 물이나 술을 제대로 즐기면서 마실 수가 없었다. 잔이 없다 보니 마실 것을 몸에다 주입하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과제였다. 잔이 없던 시절에 인류가 잔 대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는 조개 껍질, 코코넛 껍질, 바나나 잎사귀, 대나무 마디, 표주박, 동물의 뿔, 양 가죽 등 온갖 물건이 다 있다. 냇가에서 물을 마실 때처럼 그냥 맨손을 오목하게 만들거나 심지어 사람의 해골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냥 오목한 물건은 모두 잔 대신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잔 대용품은 유리잔이 귀했던 중세까지도 여전히 사용되었다. 
4000년 전의 이집트 사람들은 갈대 줄기를 빨대로 사용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커다란 암포라 단지에서 와인이나 맥주를 직접 빨아 마셨다. 영장류 중에서는 침팬지가 술을 마시는 모습이 상당히 창의적이다. 침팬지는 나뭇잎을 이빨로 스폰지처럼 씹어 만든 덩어리를 술에 적셔 다시 그 나뭇잎을 재차 씹어 먹으면서 술을 마신다. 
상황이 이러하니 8000년 역사를 지닌 와인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잔을 돌려가면서 여유롭게 마실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와인의 역사에 비해 와인 잔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유리의 기원은 기원전 2300 년경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기원전 2000전에는 페르시아를 거쳐 기원전 1500년경에는 이집트로 전래되었다. 

documentary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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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주로 장신구 등을 만들었고 유리잔이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기원전 1500년경인 이집트의 아멘호테프 2세 시절이다. 이후 기원전 400년경에는 로마에서도 유리제품을 만들었고 서기 50년경에는   파이프를 통해 유리를 불어 용기를 만드는 블로잉 기법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유리 그릇이나 유리 잔을 보다 용이하게 만들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2세기의 청동기 시대에 이미 유리제품을 만든 유적이 발견되었고, 1500년 전 신라의 천마총, 서봉총, 황금대총에서도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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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기 1400년경에는 크리스탈로(Cristallo)로 불리는 투명한 유리 제품이 이탈리아의 베니스에 있는 무라노(Murano) 섬에서 생산되어 유럽의 고급 유리시장을 독점하였다. 무라노 유리는 이탈리아의 아디제 강과 스위스의 티치노 강에서 채취한 석영 자갈을 원료로 사용하였는데 빛을 굴절시켜 무지개색이 나도록 커팅하였다. 이때 만든 대표적인 유리제품이 와인 잔과 샹데리아였다. 

이렇게 만든 유리 잔은 아주 귀하고 희소해서 현재의 다이아몬드에 버금 가는 보석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유럽이나 러시아의 왕족이나 귀족 등 소수의 사람만이 유리 잔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귀족들은 와인을 마시는 자리가 있는 경우 시종들에게 자기가 마실 잔을 휴대하게 하기도 하였다. 

초기의 와인 잔은 지금과 같은 손잡이(Stem)가 없는 현재의 소주잔과 비슷했다. 하지만 무라노 잔은 경도가 높아 쉽게 깨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1673 년부터는 산화 납을 첨가한 제품이 영국에서 대량생산되어 유리제품이 보다 대중화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산화 납은 건강에 해로워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현대와 같은 와인 잔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1700년대 후반의 와인 잔을 살펴보면 보면 잔의 크기가 지금에 비해 7분의1정도로 작은 것이 흥미롭다. 세금문제 등으로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초기에는 잔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장식을 주로 Stem에다 했다. 그리고 1900년대 이전까지는 모양이 대부분 잔의 입구(Rim)가 밖으로 벌어진 형태였다. 오늘 날에 표준이 된 위가 좁은 형태의 와인 잔은 오히려 잔에 얼마 남지 않은 와인을 마실 때 불편하다는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위가 좁은 잔은 잔을 돌릴 때 와인을 흘릴 염려가 적고, 코를 집어넣어 보다 민감하게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등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 그리고 유리가공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와인잔의 크기 및 형태도 용도에 따라 보다 세분화되고 Stem의 길이도 상대적으로 길어졌다. 용량도 커지고, 잔의 두께는 얇아졌다. 1970년에 국제표준화기구(ISO)가 만든 표준 잔도 잔의 용량이 커지는데 일조했다. 화이트 와인잔이 상대적으로 레드 와인 잔 보다 크기가 작은 것은 마시기 좋은 온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1756년에 설립된 오스트리아의 리델사는 1958년 피노 누아 전용 잔을 처음으로 출시했다. 이후 리델은 포도 품종에 따라 50여종의 전용 잔을 만들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호응을 크게 얻지는 못했다. 리델은 2004년에는 Stem이 없는 와인잔을 내놓기도 하였지만 역시 호응은 미미했다. 심지어 리델 가문의 경영자인 클라우스 리델은 맛을 느끼는 “혀의 맛 지도”를 바탕으로 와인 잔을 디자인했다고 주장했다. 리델 디자인의 독특한 곡률이 입안의 와인을 “혀의 맛 지도”에 따라 각각의 미각 부분으로 정확하게 보내어 이로 인해 사람들이 와인의 맛을 보다 완전하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맛을 각각 따로 감지하는 혀의 특정 부위가 있다는 주장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 2000년대 초에 이미 밝혀졌다. 리델사는 혀의 맛지도가 근거가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리델의 와인 잔은 효과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와인의 찌꺼기를 거르거나 산소와의 접촉시간을 늘이기 위해 사용하는 디캔터(Decanter)는 기원전의 고대 로마제국 시절부터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유리제품이 귀해지자 한 때는 금은이나 동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브랜디나 싱글 몰트 위스키를 마실 때 사용하기도 한다. 

indot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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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잔은 개별 포도품종에 따라서 몇 십 가지로 구분하는 등 훨씬 더 세부적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이렇게 까지 구분해서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6~7가지 정도로만 구분해서 마셔도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딱 떨어지게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많다.  
레드 와인  
보르도 잔: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잔으로 볼의 길이가 길고 입구(Rim)가 좁다
부르고뉴 잔: 볼과 입구가 상대적으로 넓다. 그 중에서도 피노 누아 잔은 입구가 꽃잎처럼 살짝 밖으로 구부러졌다   
화이트 와인
레드 와인 잔보다 상대적으로 볼이 좁고 크기가 작다 
스파클링 와인
샴페인 잔을 말하는데 예전에는 볼이 넓은 쿠페 잔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요즘은 거의 쓰지 않는다. 볼과 입구가   좁은 플루트 잔이나 튤립 잔이 일반적이다
로제 와인
잔이 작고 입구가 장미꽃처럼 밖으로 살짝 벌어졌다 
포트 와인
도수가 높아 보르도 잔처럼 생긴 작은 잔을 사용한다   
세리주    
역시 도수가 높아 역삼각형의 작은 잔을 사용한다

그리고 와인 잔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산이 유명한데 브랜드에 따라 가격도 차이가 많이 난다. 브랜드 인지도와 가격대를 기준으로 유명한 브랜드 몇 개를 소개한다

리델 : 2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오스트리아의 최고급 브랜드이다. 잔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 개의 가격은   소매가 기준으로 15만~20만원 사이이다
잘토 : 역사가 600년이 넘은 오스트리아 브랜드로 개당 6만원~9만원대이다
슈피겔라우 : 독일 브랜드이다. 1521년 설립되어 500년의 전통을 지녔다. 2만원~7만원대로 가격대가 넓다
즈위젤 : 150년된 독일 브랜드로 개당 10만원대이다
쇼트즈위젤 : 140년된 독일 브랜드이다. 개당 2만원~3만원대이다

보르도의 유명한 와인 거장 알렉시스 리신은 와인잔도 좋은 와인과 같이 인류가 문명화된 상징이라고 했다. 1회용 잔은 좀 그렇지만 좋은 와인이라고 해서 꼭 좋은 잔에 마셔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좋은 사람의 마음에 담아 마시는 와인이 비싼 잔보다 낫지 않겠는가. 끝.   

 


■ 와인칼럼니스트 변연배

▣ 경력
ㆍ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임원/경영학박사(현)
ㆍCoupang 부사장ㆍDHL 부사장
ㆍMotorola 아시아태평양지역 인사담당 임원
ㆍHI Solutions, Inc. 대표이사
ㆍ두산 Seagram㈜ 부사장
ㆍ주한 외국기업 인사관리협회 (KOFEN) 회장
ㆍ연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ㆍ중앙공무원 연수원 외래교수
ㆍ칼럼니스트
ㆍ와인 바/ 와인 관련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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