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칼럼니스트 [ 변연배의 와인과 함께하는 세상 60 ] 사케와 와인(2)- 사케의 역사와 이에 얽힌 이야기
와인칼럼니스트 [ 변연배의 와인과 함께하는 세상 60 ] 사케와 와인(2)- 사케의 역사와 이에 얽힌 이야기
  • 변연배 칼럼전문기자
  • 승인 2021.03.0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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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선 지난 회에서 글이 넘쳐 미처 다 쓰지 못한 이야기를 이어서 쓴다. 종류를 불문하고 한 나라의 대표적인 주류에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이와 관련된 그 나라의 문화가 보인다.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희로애락이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에는 관련된 사람들의 이야기나 술자리에서 일어난 이야기 등 이야기거리가 풍부하다. 

사케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의 역사가 녹아 있고 또 유명한 인물과 출신 지역에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와인에 있어 프랑스와 독일과의 관계처럼 이웃 나라인 우리 나라와 관련된 이야기도 숨어있다.

3000년전의 일본 “죠몬시대” 유적에서 중국에서 술을 만들 때 사용된 것과 유사한 양조 흔적이 발견된 것을 보면 일본 사람들은 이미 3000년전에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800년전에 편찬된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왜인편에도 일본 사람들의 인성이 술을 좋아한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일본 사람들이 술을 마신 역사도 제법 오래된 것 같다. 

인류가 이미 9000년 전에 술을 빚은 증거가 중국에서 발견되고 중앙 아시아에서는 8000년 전에 와인을 양조한 유적이 발견된 점, 또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2300년전 삼한 시대에 마을 단위로 술을 빚어 축제에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역적으로 멀지 않은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3000년전에 이미 술을 마셨다는 것은 그렇게 놀랄 일이 아니다. 일본 고사기에 백제 사람이 술을 빚어 천황에게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들어 백제가 일본에 양조법을 전수했다는 주장과 우리말에 “삭히다”가 “사케로” 변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두나라 간의 전통적인 양조법이나 누룩, 효모의 유전자 분석을 통해 이러한 주장이 무리라는 견해가 더 우세하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서기 700년경의 일본에서는 술을 전문으로 빚는 관청이 생기고 1000년경에는 오늘 날의 사케와 크게 다르지 않은 투명한 청주를 양조했다. 이 시대에는 사찰에서도 질 높은 술을 제조했다. 12세기 말에서 16세기 말까지 쇼군이 지배하던 막부시절엔 교토를 중심으로 전문 양조장과 함께 오늘날의 마이크로 브루어리와 같은 주점을 겸한 양조장이 융성한다. 이 때는 대부분의 술이 오늘날의 사케와 같이 여과된 형태를 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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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시대를 배경으로 한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의 1961년작 사무라이 영화 “요짐보(用心棒)”에선 주인공인 미후네 도시로가 주점에서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 술을 숙성 중이던 대형 나무통이 부서져 맑은 사케가 분출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미후네 도시로는 베네치아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황야의 무법자”의 모티브가 된 영화로도 유명하다.  
    
17세기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전국을 평정하여 도쿠가와 막부가 정권을 잡으면서 에도(江戶)시대를 연다.  에도 막부는 지방의 영주에 해당하는 번(지금의 현)의 다이묘(大名)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지금의 토쿄인 에도와 지방의 영지에서1년마다 교대로 체류하게 하는 “산킨코타이(參勤交代)” 제도를 시행하였다. 다이묘가 에도에 체류할 때에는 가신 및 휘하 병력을 포함해 한 번에 대규모 인원이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전쟁이 없어지고 평화시대가 계속됨에 따라 에도는 곧 인구가 100만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가 된다. 그 당시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인구가 10만명, 명나라의 수도 베이징이 60만명정도였고 100만을 넘는 도시로는   명나라의 난징 정도가 있었던 것을 보면 에도의 급격한 발전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주군을 따라온 사무라이들은 대부분 독신남으로서 식사는 주로 밖에서 해결하였는데 이로 인해 에도에는 각종 직업이 생겨나고 요식문화가 발달한다. 유흥산업과 이자카야(居酒屋)도 번창한다. 일본의 이자카야(居酒屋)는 8세기의 나라(奈良)시대에도 존재했던 기록이 있으나 이자카야(居酒屋)문화가 활짝 개화한 시기는 단연 에도시대이다. 이에 따라 사케 양조산업도 급속히 발전하여 전국의 명주들이 앞다투어 에도에 선을 보였다. 일부 이자카야는 19세기 말의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서양식 Bar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오늘 날의 헤드헌터와 같은 구치이레야(口入れ屋)로 불리는 직업알선 업자들도 생겨났다. 가부키(歌舞伎)나 전통적인 그림인 우끼요에(浮世絵) 등의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한다. 빈센트 반 고흐 등 서양의 인상파 화풍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카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神奈川沖浪裏, 가나가와오키나미우라)” 라는 유명한 우끼요에 목판화를 그린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도 에도시대의 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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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그림을 상표로 사용하여 니이가타(新潟)에서 시리즈로 생산되는 사케 브랜드도 있다. 에도시대엔 그 당시의 패스트푸드인 오뎅, 덴푸라, 우동, 소바, 꼬치 등을 팔던 노점들도 새로 생겨났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스시는 간편하게 먹기 위해 그때 처음 생겼다. 수산업도 발전하였다. 2018년에 폐쇄되었지만 세계 최대의 수산시장이라 불렸던 도쿄의 츠키지 시장도 이때 생겼다. 그리고 요리 반즈케(料理番付)로 불리는 요새의 미슐랭 가이드와 같은 맛집 순위표도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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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1500여개의 사케 양조장이 있고, 사케의 브랜드를 둘러싸고도 많은 이야기가 있다. 오사카 근처의 소도시인 오카야마시에 위치한 미야시타(宮下) 주조에서 양조하는 “비젠 코지마자케(備前兒島酒)”라는 브랜드에는 임진왜란과 우리나라의 한 소년과 관련된 슬픈 역사적인 이야기가 얽혀 있다.

임진왜란에 종군했다가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으로 철수한 왜군장수 중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라는 인물이 있다. 고작 스무 살의 나이로 일본군 병력 15만을 지휘하는 총대장 역할과 함께 제8군을 직접 지휘한 인물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총사령관을 맡은 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였기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초기인 1593년에는총 병력 2300명의 권율장군과 행주산성 전투에서 공방을 벌였지만3만의 병력을 투입하고서도 스스로 큰 부상을 입고 패퇴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2년 후인 1600년 일본의 패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과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의 일원으로 맞서지만 패한다. 그후 오지에 있는 작은 섬으로 도망쳐 50년을 더 살다 그 곳에서 죽었다. 비젠(備前)은 오카야마 지역에 있는 그의 아버지가 다스리던 영지 이름이다. 사케 브랜드는 그 당시 우키타 히데이에가 통제하던 오카야마성의 사케 양조법을 되살려 붙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10만여명의 조선인을 납치해 갔는데 이들 중에는 도예공 등의 전문기술자도 있었지만 재주가 뛰어난 소년, 소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년 포로는 데루마, 소녀 포로는 가쿠세이라 불렀다. 그런데 우키타 히데이는 일본으로 철수할 때 일곱 살의 한 소년을 데루마로 데려간다. 그리고 이 소년의 총명함을 알아본 우키타 히데이의 부인이 친정인 마에다(前田)가문으로 소년을 보내고, 그는 나중에 마에다 가문의 가신이었던 와키타 시게토시(脇田重俊)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 이름을 와키타 나오카타(脇田直賢)로 개명한다. 

나중에 밝혀진 기록을 보면 소년은 한양 태생의 광산 김씨 25대손으로 한림학사였으나 임진왜란 중 전사한 김시성(金詩省)의 아들 한국명 김여철(金如鐵)이다. 이후 와키타 나오카타는 오사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음악과 다도에도 능한 문무를 겸비한 지식인으로 와키타 가문의 중심 인물이 된다. 74세까지 가나자와(金沢)성의 총책임자를 맡았다가 은퇴했다. 지금도 가나자와시의 관광명소 중 하나인 교쿠센엔(玉泉園)이라는 정원은 그가 4대에 걸쳐서 만든 것이다.   

고마오(高麗王)라는 사케 브랜드도 우리나라와 관련이 깊다. 도쿄 시내에서 전철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사이타마현 히다카(日高)시에는 고마(高麗)라는 역이 있는데 역 앞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서있다. 1300년전에 고구려 유민들이 이주하여 집단으로 거주한 곳으로 근처에 있는 쇼오라쿠지(勝樂寺)라는 절을 비롯 아직도 고구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마오(高麗王)는 고구려 패망 후 사이타마에 정착한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로 알려진 한국명 고약광(高若光), 코마노코니키시 쟛코(高麗王 若光)를 지칭한다. 사케 브랜드는 여기서 유래했다.

시치혼야리(七本槍)라는 브랜드도 역사적 배경을 알고 마시면 좋다. 교토의 비와(琵琶)호 근처의 시가(滋賀)현과 미에(三重)현에서 생산되는 브랜드이다. “시즈가다케의 시치혼야리”로 불리기도 하는 시치혼야리는 7개의 창이란 뜻으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사후 정권 계승을 위한 시즈가다케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공을 세우라고 내보낸 근위대 격인 7명의 장수를 말한다. 우리에겐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장수로 기억되는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加藤淸正),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수군 사령관 휘하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 모두 시치혼야리 출신이라 그렇게 기분 좋은 브랜드는 아니다.        

kurodabu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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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福岡)현의 중심가인 하카다역에는 우동 그릇 같기도 한 커다란 접시와 창을 들고 서있는 사무라이의 동상이 있다. 그리고 기념품가게에서도 비슷한 인형을 팔기도 하는데 처음 가는 관광객은 동상의 사무라이가 누구인지도 궁금하지만 들고 있는 접시와 창의 연유가 궁금하기도 하다. 이 동상은 위에서 소개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치혼야리 중 한 사람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관련이 있다. 

후쿠오카에는 전국적으로 잘 알려진 쿠로다부시(黑田節)라는 민요가 있다. 민요에는 이 창을 가져갈 수 있도록 술을 마시면 쿠로다(黑田)의 참된 무사라는 구절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시대의 무장 쿠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가신인 모리 타헤이(母里太兵衛)가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도발한 술 내기에서 커다란 사발로 술을 마셔 천황이 하사한 니혼고오(日本号)라는 명창을 넘겨받았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kurodabu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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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이자카야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브랜드인 쿠로다부시(黑田ぶし) 혹은 쿠로다부시(黑田武士)는 민요 쿠로다부시(黑田節)와 동일한 발음을 이용해 상표로 만든 것이다. 후쿠오카현의 가마(嘉麻)시에 있는 오오사토(大里) 주조라는 양조장에서 만든다. 쿠로다부시의 민요에는 “봄의 새벽을 바라보면 당나라 사람도, 고려인도, 일본인도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어 흥미롭다. 벌써 한 줄기 바람에서도 봄기운이 느껴진다. 술이나 봄이나 어찌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사람을 가리겠는가? 끝.


■ 와인칼럼니스트 변연배

▣ 경력
ㆍ우아한 형제들 인사총괄임원/경영학박사(현)
ㆍCoupang 부사장ㆍDHL 부사장
ㆍMotorola 아시아태평양지역 인사담당 임원
ㆍHI Solutions, Inc. 대표이사
ㆍ두산 Seagram㈜ 부사장
ㆍ주한 외국기업 인사관리협회 (KOFEN) 회장
ㆍ연세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ㆍ중앙공무원 연수원 외래교수
ㆍ칼럼니스트
ㆍ와인 바/ 와인 관련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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